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283화

별이 쏟아지던 밤의 약속

밤은 깊었고, 서연의 작은 원룸 창밖으로는 희미하게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밤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테이블 위 낡은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진행자 지우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지치고 불안한 서연의 하루를 잔잔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오늘은 유난히 고요했다. 서연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지우는 한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주고 있었다. 오래된 사랑을 잊지 못해 방황하는 마음을 담은 사연이었다.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사랑은 때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 상처를 보듬는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이겠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그저 밤하늘의 별처럼, 그 빛이 먼 곳에서부터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지우의 나직한 목소리에 이어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머릿속에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흐릿했던 기억의 필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감기는 듯했다.

그때는 이맘때쯤이었을까. 아직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늦은 밤, 준호와 함께 옥상에 올라 별을 헤던 기억. 손을 잡고 서로의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 밤이었다. 도시의 불빛 너머로 드물게 보이는 별들이 마치 우리의 약속을 지켜봐 주는 증인 같았다. 준호는 반짝이는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서연아, 저 별들은 수억 년 전의 빛이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하는 거래. 우리가 지금 힘들고 외로워도, 언젠가 우리도 저 별들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빛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 꾸는 꿈도 언젠가는 저 빛처럼 세상에 닿을 거고.”

그의 목소리에는 믿음과 확신이 가득했다. 서연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때 우리는 너무도 순수했고, 함께라면 세상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별똥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던 밤. 그 맹세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사이에서 영원히 반짝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가혹했다. 준호의 꿈은 좌절되었고, 이내 그는 서연의 손을 놓아야만 했다. 서연은 그날 이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피했다. 수억 년 전의 빛이 이제야 도착하듯, 준호와의 추억도 때로는 뒤늦게 찾아와 서연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음악이 절정에 달하자, 서연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차가 식어버린 머그잔을 꼭 쥐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울대가 뜨거웠다. 참으려 해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밤의 별빛이 너무도 눈부셔서, 지금의 어둠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음악이 끝나고, 지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욱 깊고 차분한 어조였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 속 별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단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거나, 우리가 너무 지쳐서 올려다볼 힘조차 없을 뿐이죠. 하지만 그 별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이 다시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볼 때, 여전히 그 빛을 전해주기 위해서요.”

서연은 흐르는 눈물 사이로 희미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더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지우의 말처럼, 사라진 것은 별이 아니라, 별을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었을까. 준호의 꿈이 좌절되고, 그가 자신을 떠나갔을 때, 서연은 함께 꿨던 그 꿈도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서연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서연은 천천히 머그잔을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섰다.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짚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어쩐지 미세하게나마 단단해진 듯 보였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그 기억과 마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수억 년의 시간을 거쳐 빛을 보내오는 별들처럼. 준호의 말이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우리가 지금 힘들고 외로워도, 언젠가 우리도 저 별들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빛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 꾸는 꿈도 언젠가는 저 빛처럼 세상에 닿을 거고.’

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낮게 속삭였다. “그래, 준호야. 우리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어딘가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을 거야.”

라디오에서는 다음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희망적인 멜로디였다. 서연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빛나는 몇 개의 별들이, 그녀의 눈물젖은 시야 속에서 마치 준호가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따뜻하게 그녀를 비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외면하지 않으리라. 그 별빛을, 그리고 그 별빛 속에 담긴 자신들의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