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별의 도시, 에테르나의 인공 광채로 늘 푸르렀다. 그러나 카이의 작은 공방 창문 너머로는 진짜 별들이, 마치 망각된 기억의 조각들처럼, 희미하게 반짝였다. 투박한 나무 작업대에 앉아 망가진 시간의 파편, 즉 ‘메모리 코어’를 수리하던 카이의 손길은 능숙했지만, 그의 마음은 늘 그림자 같은 공허함에 잠겨 있었다.
“또 그 꿈인가요, 주인장?”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건 카이의 오랜 조수이자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루나’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별빛처럼 흩날리는 소녀는, 뜨거운 차 한 잔을 내밀며 카이의 어깨에 기대왔다. 차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김처럼, 루나의 존재는 카이의 얼어붙은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카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늘 똑같은 꿈이야. 부서지는 거울, 흩어지는 빛,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그는 기억을 잃은 시간 여행자였다.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며 이 에테르나에 정착한 지도 어언 수십 년. 그는 여기서 낡은 시간 장치들을 수리하며 살아갔고, 루나와 함께 작은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이 평화로운 일상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지만, 텅 빈 과거는 늘 그의 발목을 잡는 그림자였다.
루나는 카이의 손에 들린 메모리 코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조각들도 언젠가 주인장의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까요?”
“글쎄다.” 카이는 메모리 코어의 깨진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것들은 단지 시간의 흔적일 뿐. 내 과거를 담고 있는 건… 내 안의 어딘가에 있겠지. 닿을 수 없는 곳에.”
그 순간, 공방의 낡은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림자 같은 남자가 문간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날카로웠고, 온몸에서는 시간의 먼지가 아닌, 고통과 집념의 냄새가 풍겼다. 카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과거에서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카이.”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속에는 원망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당신을 찾아 얼마나 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왔는지…!”
카이는 루나를 등 뒤로 숨기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시죠?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른다고? 하긴, 그게 당신의 특기였지. 중요한 건 전부 잊어버리고, 늘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것.” 그의 시선은 카이의 손에 들린 메모리 코어에 닿았다. “여전히 시간의 파편들을 만지고 있군. 그게 당신의 본능이니까.”
카이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텅 비어 있던 과거의 지평선에, 마치 번개처럼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 버려 무엇이었는지 잡을 수 없었다.
시간의 그림자
남자는 천천히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자국이 낡은 마룻바닥에 축축한 흔적을 남겼다. 루나는 카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 남자가 풍기는 위협적인 기운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 이름은 리안이다.”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당신과 나는… 오랜 동지였다.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시간의 파수꾼’이었을 때.”
‘시간의 파수꾼’. 그 단어가 카이의 뇌리를 강타했다. 잊혀진 기억의 심연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아득하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빠르게 교차했다. 거대한 시계탑, 푸른 망토를 두른 사람들, 차갑고 단단한 시간의 흐름… 그리고 자신과 닮은 얼굴의 사람들.
“헛소리 마십시오.” 카이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수리공일 뿐. 기억을 잃은 채 이곳에 떠밀려온 자입니다.”
리안은 피식 웃었다. “평범? 하하! 당신만큼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자가 또 있을까? 당신은 시간의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자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당신의 본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의 목소리는 카이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잊고 싶었던, 혹은 잊어야만 했던 진실이 숨어있는 듯했다. 리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과거의 족쇄를 끌어당기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
“우리는 함께 시간의 균열을 막았고, 파괴된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당신은… 마지막 임무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지.” 리안의 눈빛에 고통이 스쳤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숨어 있었던 거야. 이 작은 공방에, 이 평화로운 도시에…”
루나가 나섰다. “그만하세요! 주인장에게 그런 과거는 없어요. 주인장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어요!”
리안은 루나를 냉정하게 바라봤다. “어린아이로군. 이런 어설픈 평화가 얼마나 오래갈 것 같나? 시간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는 카이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는 당신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했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릴 유일한 열쇠를… 당신에게 맡겼었다.”
카이의 손에 들린 메모리 코어가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리안의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카이는 깜짝 놀라 코어를 떨어뜨릴 뻔했다. 코어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리안의 얼굴에 희망과 집착이 교차했다. “그거군! 역시 당신은 그 열쇠를 품고 있었어. ‘시원의 조각’!”
잊혀진 서약
카이는 바닥에 떨어진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을 응시했다. 그것은 그가 수리하던 평범한 메모리 코어와는 달랐다. 생생한 에너지와 아득한 기억의 파장이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빠르게 이어졌다. 붉게 물든 하늘, 무너지는 구조물,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동료들의 모습. 그 중심에는 늘 자신이 있었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애쓰는 자신의 모습이.
“시원의 조각… 그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카이의 목소리는 떨렸다.
리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시간의 시초에 존재했던 유일한 기록이다. 모든 시간의 흐름을 조율하고, 무너진 역사를 복구할 수 있는 궁극의 열쇠.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의 눈동자가 광기에 번뜩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파괴의 조각이 되어버렸어. 시원의 조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모든 시간선이 뒤엉켜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무(無)라니….” 루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리가 싸웠던 그 존재들… ‘공허의 그림자’들이 시원의 조각을 오염시켰다. 우리가 패배한 순간, 당신은 조각을 품고 도주했고… 우리는 그 여파로 셀 수 없는 동료들을 잃었다.” 리안은 카이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는 떨림이 느껴졌다. “왜 그때 도망쳤지? 왜 우리를 버렸지? 대답해, 카이!”
카이는 리안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움과 함께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기억조차 없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모든 비극에… 내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그때, 바닥의 시원의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강렬해졌다. 공방 안의 모든 전등이 깜빡였고, 낡은 시계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카이의 머릿속에 또 다른 파편적인 기억이 삽입되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속삭임. ‘기억을 잃어도, 조각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너의 사명을 잊지 마라.’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에게 남긴 경고이자 서약이었다.
리안은 시원의 조각을 주으려 손을 뻗었다. “그것을 내게 넘겨라, 카이.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공허의 그림자들이 이미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당신이 기억을 잃은 채 평화롭게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모든 시간선을 잠식하고 있었다!”
“공허의 그림자….” 카이는 무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되뇌었다. 마치 오래된 적의 이름인 양, 본능적인 경고음이 그의 뇌리에서 울렸다.
바로 그때, 공방의 창문이 와장창 깨지며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찢어진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들은 형체 없이 일렁이는 검은 안개와 같았지만, 그 속에는 섬뜩한 붉은 눈동자들이 번뜩였다. 에테르나의 평화로운 밤하늘을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이는 존재들이었다.
“왔군.” 리안은 씁쓸하게 말했다. “당신의 과거가, 당신이 버린 사명이… 이제 당신을 찾아왔다.”
카이는 루나를 보호하듯 품에 안았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작은 공방과, 그 안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본능이 솟구쳤다. 기억은 없었지만, 그의 육체는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원의 조각이 그의 손 안에서 푸른빛을 뿜으며 떨렸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거대한 힘이 깨어나는 신호와도 같았다. 잃어버린 과거가 그의 현재를 덮치고, 카이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