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태한의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서울의 골목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고요했고, 가로등 불빛만이 뿌연 안개 속에서 외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든 낡은 사진 한 장.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빛바랜 이미지 속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녀, 수아의 해맑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1298번째의 아침, 태한은 또다시 이 사진 속 미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밤, 익명의 제보로 얻은 단서는 그를 이곳, 잊혀진 시간 속에 갇힌 듯한 낡은 사진관으로 이끌었다.
「추억 사진관」
빛바랜 간판이 덜렁거렸다. 한때는 수많은 이들의 행복한 순간을 담아냈을 이 공간은 이제 철거를 기다리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창문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굳게 닫힌 문틈으로는 쓰러져가는 건물의 쿰쿰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이곳은 수아가 어린 시절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꿈 많던 소녀 수아가 카메라를 들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첫발을 내디뎠던 곳. 태한은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 수아의 온기가 남아있을까 하는 덧없는 희망을 품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내부는 예상대로 암흑과 먼지로 가득했다. 플래시를 켜자, 희미한 빛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수억 개의 먼지 입자를 춤추게 했다. 낡은 카메라들이 선반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깨진 현상액 병과 빛바랜 인화지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태한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과거의 잔해 속에서 그는 수아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누구요, 거기? 여긴 볼 거 없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태한은 화들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뒷문 쪽에서 한 노인이 나타났다. 허름한 차림에 곱사등을 한 노인은 마치 이 폐허의 수호신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나이테처럼 깊은 주름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시선은 날카로웠다.
“실례합니다. 저는 강태한이라고 합니다. 혹시 김영감님이십니까?”
태한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제보자는 이 사진관의 오랜 주인이었던 김영감을 찾아보라고 했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태한에게 다가왔다. 그의 낡은 옷에서는 오래된 나무와 흙먼지 냄새가 났다.
“김영감이라… 그런 호칭을 들을 만큼 오래 살긴 했지. 근데 자네는 누구야? 내가 말이야, 여길 정리하러 왔는데, 쓸데없는 소리만 듣고 가면 곤란해.”
노인의 목소리에는 불신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태한은 천천히 수아의 사진을 내밀었다. 노인의 눈이 사진 속 수아에게 닿는 순간, 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아주 잠시, 깊은 슬픔이 그 안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 아이를 아십니까? 이수아입니다. 제 첫사랑입니다.”
태한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노인은 사진을 받아들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이 사진 속 수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수아… 그래, 수아였지. 이 아이가… 여길 얼마나 좋아했는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뭐든지 다 찍으려 했었지. 꿈이 많은 아이였어.”
노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수아의 이름은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을 녹이는 열쇠였다. 태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영감님, 혹시 수아가 사라지기 전,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아니면 혹시… 누굴 만났다거나, 뭔가 남긴 게 있을까요?”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시선은 사진관의 낡은 벽을 훑었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으려는 듯이.
“특이한 점이라… 이 아이가 사라지기 며칠 전이었을 거야. 어느 날 저녁에 말이야, 여기 와서 밤새도록 필름을 현상했어. 평소 같으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재밌는 얘기를 나누면서 했는데, 그날은 유독 조용했지. 무슨 중요한 필름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못 보게 했어. 비밀 프로젝트라나 뭐라나.”
태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밀 프로젝트. 수아는 항상 특별한 것을 꿈꾸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수아가 이걸 맡겼어.”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허리춤에 달린 낡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작고 검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안에 겨우 들어올 만한 크기, decades of waiting. 낡았지만 어딘가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는 그것은 바로, 필름 롤이었다. 아직 인화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담고 있는 필름 롤.
“수아가 말이야, ‘영감님, 이거… 제가 다시 올 때까지 꼭 가지고 계셔야 해요. 이건 정말 중요한 거니까요.’ 그렇게 말했어. 근데… 다시는 안 왔지. 나도 이걸 왜 여태 가지고 있었는지 몰라. 그냥… 수아가 돌아올 것 같아서….”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한은 필름 롤을 받아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필름 속에는 수아의 마지막 흔적, 어쩌면 그녀의 사라진 이유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이 떨렸다.
“영감님, 이걸… 이걸 제가 현상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 기다림과 체념,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 교차했다. “이젠… 그럴 때가 된 것 같구먼. 수아도 그걸 바랄 거야.”
태한은 급히 사진관 뒤편의 작은 암실로 향했다. 희미한 붉은 불빛만이 암실을 감쌌다. 낡은 현상 장비들이 먼지 속에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손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필름을 현상기에 넣고, 액체 속에 담그자 시간은 더욱 느려지는 듯했다. 태한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렸다. 20여 년 만에, 수아의 마지막 필름이 세상의 빛을 볼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모든 소음을 삼키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태한의 눈동자는 오직 현상액 속의 필름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진.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미지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며, 잃어버린 수아의 마지막 비밀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아는… 무엇을 찍었던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풍경 사진이 아니었다. 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의 입구에 서 있는, 낯설지만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자. 태한의 눈이 그 남자의 얼굴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얼굴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