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325화

깊어가는 밤, 도심의 불빛은 별빛을 삼켰지만, 이곳 스튜디오만큼은 영롱한 별들로 가득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는 어느새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건 오직 낮게 깔린 재즈 선율과, 익숙한 목소리의 온기였다. 마이크 앞에 앉은 윤세영은 손에 들린 편지를 잠시 내려놓고 유리창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창밖은 보이지 않는 별들로 가득할 터였다. 1325화. 실로 오랜 시간이었다. 수많은 밤,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작은 공간을 거쳐 전파를 타고 흘러나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윤세영입니다. 이 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든 고요 속에서, 오직 여러분의 마음속 별들만이 반짝이는 밤입니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오늘은 그 안에 묘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 도착한 수많은 사연 중에서도 유독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얇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봉투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듯했다. 글씨체는 단정했고, 사연은 가슴 시리도록 아련했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수민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세영은 잠시 숨을 고른 뒤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세영 DJ님. 제 이름은 수민입니다. 스물아홉 살이고, 곧 서른을 맞이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저희 집 라디오는 늘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 늘 라디오 앞을 지키셨고, 저는 그 옆에 엎드려 숙제를 하곤 했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DJ님의 목소리는 저희 집의 풍경이자, 제 유년의 소리였습니다.

얼마 전, 이사를 준비하다가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열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과 함께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몇 개가 들어 있더군요. 그중에는 아버지가 직접 녹음해 두신 ‘별밤’ 방송이 담긴 테이프도 있었습니다. 1999년 10월 12일 밤,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세영은 편지를 읽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1999년. 그 시절은 그에게도 특별한 기억이었다. 세기의 전환점을 앞두고 세상이 들떠 있던 시기, ‘별밤’ 또한 새로운 챕터를 맞이하던 때였다.

녹음된 방송을 틀었을 때, 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20년도 더 된 과거의 제 아버지 목소리가 그 안에 담겨 있었거든요. ‘별밤’에 신청곡을 보냈던 아버지의 사연과, 그 사연을 읽어주시는 DJ님의 목소리가요. 그때 아버지는 제가 좋아하는 동요를 신청하시면서, 제가 언제나 별처럼 반짝이는 아이로 자라나길 바란다는 사연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방송 말미에,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덧붙이신 말이 있었습니다. “세영 DJ, 이 노래를 듣고 나면, 우리 수민이가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러 와 줄까?”

편지를 읽던 세영의 목소리가 멈칫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순간, 20년 전의 어느 별 박힌 밤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수많은 사연들, 수많은 이름들, 수많은 별 같은 염원들. 그 모든 것이 아득한 기억의 장막 저편에 희미하게 존재했지만, 이 편지는 그 장막을 걷어내고 한 순간의 선명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그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어린 딸을 위한 아빠의 사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지극한 사랑의 무게를.

그 녹음 속의 아버지는 제가 알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젊고,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때의 아버지는 암 투병 중이셨고, 방송이 녹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그 테이프를 들으며,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셨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셨을지 생각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 테이프는 저에게 아버지가 남기신 가장 소중한 유품이 되었습니다.

세영 DJ님. 그때 아버지가 저를 위해 신청하셨던 동요는 이제 제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저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 노래를 다시 한번 이 밤에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혼잣말, ‘이 노래를 듣고 나면, 우리 수민이가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러 와 줄까?’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밤, 아버지를 꿈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다시 한번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처럼 빛나기를 바랍니다.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자 세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맺혔다. 라디오를 진행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이처럼 가슴 저미는 사연들을 수없이 받아 왔다. 하지만 수민 씨의 이야기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한 청취자의 사연을 넘어,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힘을 증명하는 듯했다.

“수민 씨, 그리고 수민 씨의 아버지… 저도 기억합니다. 그때의 사연과, 그 간절했던 목소리를요. 어쩌면 제 기억 속의 파편과 수민 씨가 간직한 녹음 테이프가 이렇게 긴 시간 끝에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그는 마이크를 잠시 끄고 고개를 들었다. 스튜디오의 천장을 올려다보니, 마치 그곳에 수많은 별들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별들 중 하나가 수민 씨의 아버지의 별일까. 또 다른 하나는 수민 씨의 별일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20년 전 그 밤, 어린 수민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그 노래를 신청했을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다시 마이크를 켰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럽고 따뜻해져 있었다.

“수민 씨의 아버지가 신청했던 노래, 그리고 수민 씨가 오늘 밤 꿈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가 아끼는, 아니, 우리 모두가 아끼는 그 노래를 다시 한번 띄워 드립니다. 이 노래가 흐르는 동안, 잠시 눈을 감고 소중한 추억을 되새겨 보세요. 혹은, 오래된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그리운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분명 그들이 여러분의 밤을 밝혀줄 겁니다.”

세영은 스위치를 눌렀다. 스튜디오의 앰프에서 은은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맑고 청아한 피아노 선율과 부드러운 현악기 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PD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윤세영 DJ가 이토록 감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세영은 눈을 감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그 선율이 그의 심장을 고요하게 울렸다. 이 노래는 단순한 동요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을 잇는 다리이자,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마법이었다. 노래의 가사는 별, 꿈,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어둠 속, 한 가수의 목소리가 별처럼 잔잔하게 흘렀다.

저 멀리 반짝이는 작은 별 하나
내 품에 안겨 잠든 너를 닮았네
꿈속에서 만난 세상은
언제나 빛나는 너의 미소
사랑하는 아가, 영원히 빛나렴
밤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세영은 말없이 유리창 너머의 어둠을 다시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 수많은 밤의 청취자들이 이 노래를 듣고 있을 터였다. 어린 수민 씨처럼, 혹은 수민 씨의 아버지처럼,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누군가는 그리운 이를 위해 이 노래를 들을 것이다. 라디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타래였다.

노래가 끝나자 스튜디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고요함 속에서 세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민 씨, 부디 오늘 밤 꿈에서 아버지와 만나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수민 씨의 아버지는 분명, 지금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수민 씨를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 숨 쉰다는 것을 저는 이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통해 수없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금 깊고 울림 있는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별을 선물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들도 함께 줍니다. 그 기억들이 때로는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를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그 기억들을 보듬고, 때로는 새로이 발견하며, 여러분의 밤을 밝히는 작은 별이 되고 싶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수민의 작은 방을 감쌌다.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 옆에 앉아 있던 수민은 눈물을 닦았다. 20년 전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그 노래, 그리고 오늘 밤 다시 들은 그 노래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어루만졌다. 아버지의 마지막 혼잣말이 비로소 그녀의 가슴에 온전히 닿는 듯했다. ‘이 노래를 듣고 나면, 우리 수민이가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러 와 줄까?’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오늘 밤은 꼭 만나러 갈게요. 별이 쏟아지는 꿈속에서. 그녀는 테이프를 소중히 품에 안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서는 윤세영 DJ의 따뜻한 목소리가 다음 사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은 깊었지만, 수민의 마음속에는 별들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잠시 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오늘 밤도, 별처럼 빛나는 꿈 꾸세요.”

아련한 엔딩 음악이 흐르며,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 밤은 더욱 깊어졌다. 수민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 밤이,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밤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20년 전의 잊힌 기억 속에, 어쩌면 더 중요한 연결고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라디오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끈이 되어 밤하늘 아래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