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배달부와 이름 없는 편지 – 제424화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우체국 마당에는 눅눅한 공기가 서성였다. 김석우 집배원은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익숙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수십 년간 수만 개의 길을 헤매며 단련된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지만, 마음속은 늘 무언가에 이끌리듯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에게는 매일 배달해야 할 주소가 명확한 편지들 외에도, 주소를 알 수 없는, 이름 없는 편지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봉투에 담겨 오기도 했고, 때로는 찢어진 노트 한 장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내용만 있을 뿐,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알 수 없는, 오직 감정만이 덩어리진 그런 편지들. 석우는 그것들을 ‘마음의 조각’이라 불렀다.

오늘 아침, 그의 가방 깊숙한 곳에는 어제 발견한 이름 없는 편지 한 통이 숨겨져 있었다. 오래된 동네 어귀의 낡은 공원 벤치 밑에서 발견된 그것은, 얇은 편지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서 홀로 그 편지를 펼쳤을 때, 석우의 가슴은 오래된 서랍 속에서 잊고 지내던 보물을 찾아낸 듯 아련한 통증과 함께 떨렸다.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나의 오랜 친구에게.

기억나니? 우리가 늘 숨바꼭질을 하던 그 느티나무 아래, 작은 오솔길 옆에 네가 심어주었던 봉숭아 씨앗. 작고 여린 손으로 흙을 토닥이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때는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빨간 꽃을 피울 때까지,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지.

하지만 나는 갑자기 떠나야 했고, 너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어. 어른이 되어 돌아온 지금, 그 느티나무는 여전한데, 봉숭아 씨앗은… 어른의 키만큼 자랐을까? 아니, 어쩌면 기억조차 못할 수도 있겠지. 나의 무책임한 침묵이 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친구. 이 편지가 혹여 너에게 닿는다면, 나의 서툰 사과와 늦은 그리움이 전해질 수 있을까. 그 봉숭아 씨앗처럼, 우리의 인연도 어디선가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편지 속 문장들은 펜으로 눌러쓴 흔적이 깊어, 쓰인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석우는 편지지를 든 손을 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봉숭아 씨앗. 느티나무 아래 오솔길. 잊고 지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 한 조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 역시 어린 시절, 동네를 떠나며 단 한 번의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졌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함께 심었던, 비록 봉숭아는 아니었지만, 여린 꽃씨가 있었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아련한 그리움이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되살아났다.

아침 배달을 시작하며 석우의 머릿속은 온통 그 편지로 가득했다. 이 편지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편지 속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너에게’라는 문장처럼, 모든 것이 막연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편지가 향해야 할 곳을, 그는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우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걸었다. 낡은 공원 옆을 지날 때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한 할머니가 그 벤치에 앉아 저 멀리, 느티나무 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한여름에도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다니는 최여사님이었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 중 한 분이었다. 최여사님은 가끔 석우에게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늘 그 이야기 끝에는 갑자기 이사 가버린 어린 친구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최여사님 댁 마당 한구석에는,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게 매년 피어나는 봉숭아가 조용히 피고 지고 있었다.

석우는 최여사님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알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공원으로 들어섰다. 쭈뼛거리며 그녀의 옆 벤치에 앉았다. “최여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최여사님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함께 촉촉한 그리움이 맺혀 있었다. “아, 집배원 양반. 오늘도 고생이 많네. 이 늙은이는 매일 여기 앉아서 이 느티나무만 보고 있으면, 옛날 생각이 난다네.”

석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어렸을 적 친구분 생각 나세요?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하시던….”

최여사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허허, 집배원 양반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먼. 그럼. 매일 생각나지. 봉숭아 씨앗 하나 나눠 심자고 약속했던 녀석이었는데, 글쎄, 인사도 못 하고 떠나버렸어. 그 봉숭아가 아직도 이 동네 어딘가에 피어나는 걸 보면, 혹시 그 아이도 나처럼 이 동네를 잊지 못하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석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편지의 내용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최여사님의 말. 물론 편지를 쓴 사람이 그녀의 친구인지, 혹은 최여사님이 편지를 받아야 할 그 친구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느꼈다. 이 편지가 품고 있는 마음은, 최여사님의 가슴속 그리움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그 이름 없는 편지를 꺼냈다. 오래된 봉투는 그의 손 안에서 따뜻하게 느껴졌다. 석우는 최여사님에게 직접 건네는 대신, 그녀의 시선이 느티나무에 머무는 사이, 슬며시 편지를 벤치 끝에 놓아두었다. 이름 없는 편지, 어쩌면 영원히 주인을 찾지 못할 편지. 하지만 이 순간, 그 편지는 분명 누군가의 그리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아이고, 내가 또 옛날이야기만 주절거렸네. 어서 일 보러 가게나, 집배원 양반.” 최여사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 뒤로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석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치 끝에 놓인 봉투는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우체부의 임무를 완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편지가 품고 있던 마음의 조각을, 가장 적절한 곳에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가벼워진 가방만큼이나 마음도 홀가분해진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수백 개의 이름 없는 편지들이 그의 어깨를 누르는 듯한 먹먹함이 찾아왔다. 느티나무 아래, 작은 오솔길 옆. 어쩌면 봉숭아 씨앗은 수십 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듯, 지금도 그곳에서 끈질기게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석우는 그 풍경을 뒤로하고, 다음 배달을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길은, 여전히 주소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마음의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조각들을 위한 침묵의 배달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