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셋, 기묘한 흔적
도시의 밤은 늘 그랬다. 스물셋, 이진우의 삶도 그랬다. 스물세 살의 그는 스물세 층짜리 오피스텔 스물세 호에서 살았다. 층수와 호수를 합쳐 스물세 호라니, 마치 삶이 반복되는 숫자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이 바다처럼 일렁였고, 그 빛들은 밤의 장막 아래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우의 작은 방은 그 모든 소음과 분주함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된, 고요한 섬이었다.
“젠장, 이놈의 현기증은 언제쯤 가실까.”
진우는 책상 위의 낡은 고서 『선도진경(仙道眞經)』을 덮었다. 경전의 한 줄, 한 줄에 정신을 집중하는 일은 여전히 그에게 쉽지 않았다. 온몸의 기맥을 타고 흐르는 미약한 기운을 느끼는 것조차 아직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골(仙骨)이니 영근(靈根)이니 하는 것은 진우에게는 그저 먼 옛날 이야기 속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오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이 기묘한 수련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현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신선이 되겠다고 앉아 있는 자신이 어딘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매일 밤 이 작은 방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시의 소음이 잠시 멎는 듯한 그 순간, 얇디얇은 영기(靈氣)의 조각들이 공기 중에 흐느적거리는 것을 느끼려 노력했다. 물론, 대부분은 실패였다. 오늘은 특히 피로감이 심했다. 어설프게 기운을 끌어모으려다 부작용이라도 온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싶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르려던 찰나,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TV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마치 누군가 손으로 툭 민 것처럼 미끄러져 떨어져 있었다.
“뭐야? 내가 잘못 놨나?”
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리모컨을 주워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렸다. 조금 전의 현기증 때문인지 눈이 침침하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다시 물을 마시러 가던 진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철컥.
거실 한쪽에 있는 작은 다용도실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히 조금 전,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문을 닫았었다. 특히 다용도실 문은 걸쇠까지 채워 잠갔던 기억이 생생했다. 혹시 집이 오래되어 문이 헐거워졌나? 진우는 다용도실 문으로 다가가 걸쇠를 꼼꼼히 확인했다.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뭐지, 착각인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리는 걸까? 진우는 이마를 짚었다. 수련에 너무 몰두한 부작용인가. 아니면 그저 과로인가.
그날 밤은 왠지 모르게 잠 못 드는 밤이었다. 새벽녘, 간신히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위이잉-
갑자기 냉장고의 압축기가 과열된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보통보다 훨씬 크고 거슬리는 소리였다. 진우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차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보니 내부의 불빛은 멀쩡히 들어왔고, 음식물도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 순간, 거실에서 다시 한번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거실 창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진우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솟구쳤다. 그는 재빨리 거실로 향했다. 거실 창문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밤의 정적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옅은 비린내가 느껴졌다. 마치 낡은 쇠붙이와 흙탕물이 뒤섞인 듯한, 불쾌한 냄새였다.
“이건… 대체….”
진우는 더 이상 자신의 착각이나 과로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부적과 작은 수정 구슬, 그리고 낡은 은비녀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할머니는 그에게 “이것들은 너를 지켜줄 것이며, 너의 길을 안내할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쓰지 마라. 네가 진정으로 힘을 깨닫는 날까지는.”이라고 말했었다.
진우는 은비녀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자,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미약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그저 차갑고 단단한 은 조각에 불과했던 비녀가, 마치 그의 손끝과 반응하듯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젠장,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진우는 은비녀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고서에서 배웠던 영시(靈視)의 기법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온 감각을 곤두세워 주변의 기운을 느끼려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도시의 무수한 전자파와 생활의 잡념만이 뒤섞인 탁한 기운의 바다였다. 하지만 그가 의지를 집중하고, 은비녀의 기운을 빌리자, 서서히, 미세한 파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동이었다. 마치 물 위에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잔물결처럼, 진우의 아파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불안정했다.
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는 은비녀를 든 채로 거실로 나섰다.
파동의 진원지는 거실이었다. 정확히는, 소파 뒤편의 벽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진우가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공기 중의 냉기가 더욱 짙어졌다. 비린내도 강해졌다.
“너, 도대체 누구냐.”
진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은비녀의 끝을 벽면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쉬이이익-
은비녀가 벽에 닿자마자, 갑자기 벽면에서 푸른 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진우는 똑똑히 목격했다. 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내 벽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흐릿한 연기처럼 보이면서도, 때로는 날개 달린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때로는 기다란 촉수처럼 뻗어 나가는 알 수 없는 형태였다. 그것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고, 그저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며 불안정하게 표류하는 듯했다. 마치 오랜 시간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난 존재처럼.
“이게… 폴터가이스트? 아니, 단순한 장난질이 아니야.”
진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에 반응하는 흔한 유령이나, 단순히 심령 현상으로 치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서에 기록된, 특정한 조건을 갖춘 공간에서만 발생하는 ‘이계의 파동’, 혹은 ‘영체 파편’과 유사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존재가 빛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진우가 은비녀를 가까이 대자, 그것은 마치 자극을 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쿠구궁!
아파트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거실의 커튼이 펄럭였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이 뚝뚝 떨어져 깨지고, 작은 장식품들이 산산조각 났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아수라장이었다.
진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팔에 힘줄이 불거졌다. 은비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감히… 내 수련의 공간을 망치려 드느냐!”
진우는 소리쳤다. 비록 그의 수련이 미약하고,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오랜 가문의 혈통에서 비롯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은비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고서에서 어렴풋이 기억하던 퇴마의 술법 중 가장 간단한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특정 영물을 제어하거나, 불순한 기운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사용되는 원시적인 주술이었다.
“물러서라, 불결한 파동이여! 제자리에 돌아가라!”
진우는 주문을 외우며 은비녀를 벽을 향해 내리찍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은비녀 끝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른빛 섬광이 벽면의 알 수 없는 형체를 향해 쏘아졌다.
쉬이이이이익- 콰아앙!
마치 거대한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면의 푸른빛 아지랑이와 알 수 없는 형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일그러지더니, 이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버텼다. 은비녀의 기운을 끌어모으는 것이 그의 미약한 몸에는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온몸의 기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점점 푸른빛이 약해지고, 형체도 희미해졌다.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벽면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깨진 액자와 흩어진 장식품들만이 방금 일어났던 사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허탈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벽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빛을 쏘았던 벽면의 정중앙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숯으로 그린 것처럼 진한 검은색이었고, 그 안에는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 비친 그림자처럼,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고서에서 본 적이 있는 아주 오래된 ‘경계석(境界石)’의 일부를 나타내는 듯한 문양이었다.
“젠장… 이걸로 끝이 아니었잖아.”
진우는 낮게 읊조렸다. 퇴마의 술법은 그저 일시적인 봉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벽면에 남은 자국은 그 존재가 이 아파트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문양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라, 이계의 무언가가 이 현실 세계로 침투하고 있다는 불길한 전조 같았다.
그의 아파트, 스물세 호에서 벌어진 기괴한 밤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과연 이 평범한 도시 속에서, 이진우는 어떤 운명과 마주하게 될 것인가. 그의 눈동자에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결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진우의 방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한 섬이 아니었다. 거대한 파도가 곧 덮쳐올, 위태로운 바위섬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