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낡은 석판과 심연의 속삭임

눈을 감으면 희미한 기계 소음과 커피 향이 났다. 낡은 키보드 위에서 춤추던 손가락의 감각. 그리고, 시야를 가득 메웠던 맹렬한 섬광.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이 시작되었다.

몸이 뒤바뀌고,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채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지 벌써 15년. 전생의 기억은 간혹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면 깊숙이 뿌리 박힌 채 현재의 나를 규정하는 하나의 거대한 지층이었다. 나는 이 세계, 엘드리안 마법 학원의 3학년 학생, 아렌이었다.

엘드리안은 대륙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망 높은 마법 학원이었다. 수백 년 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위압적으로 솟아 있었고, 어디를 가나 고위 귀족 자제들이나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활보했다. 나는 그 속에서 꽤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특출난 재능도, 대단한 가문의 후광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마법사 지망생. 그나마 전생의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방식 덕분에 이론 수업에서는 두각을 드러냈지만, 실기 시험은 늘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흔히 말하는 ‘잡기’에 능했지만, 정작 필요한 마법 실력은 미묘한 그런 타입이었다.

그날 밤도 평소와 다름없이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보름달은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력 공급이 불안정한 기숙사 침대는 영 익숙해지지 않았고, 학원 내부에 미묘하게 흐르는 마나의 불균형이 신경을 긁었다. 학원은 늘 엄청난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오늘은 그 마력 속에 이질적인 ‘무엇’이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잘 조율된 오케스트라에 섞여든 불협화음처럼.

전생의 내가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때처럼, 내 이성은 이 불협화음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호기심은 언제나 나를 문제의 핵심으로 이끌었다. 설마 이곳 엘드리안 학원에 내가 감히 파헤쳐서는 안 될 ‘오류’ 따위가 있을 리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벗어나 가운을 걸쳤다. 기숙사 복도는 깊은 잠에 빠져 고요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달빛 아래, 학원의 그림자는 더욱 길고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복도를 걸었다. 이질적인 마나의 파동은 미약했지만, 분명히 ‘저 아래’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본관 건물을 가로질러 오래된 서고 쪽으로 향했다. 서고는 보통 학생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고문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는 곳. 이곳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서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마나의 불협화음은 더욱 선명해졌다. 차가운 기운, 그리고 알 수 없는 중압감. 마치 심연이 숨 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젠장… 정말 여기란 말이야?”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서고의 가장 안쪽, 거대한 서가들 뒤편에 숨겨진 좁은 통로가 보였다. 서가 하나가 다른 서가와는 다르게, 벽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분명 그 뒤편엔 공간이 없을 터인데,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강하게 몰아치는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그 서가를 힘주어 밀어 보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서가가 움직였다. 예상대로였다. 낡은 서가 뒤편으로는 좁은 통로가 나 있었고, 통로 끝에는 오래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철문은 녹슬어 있었고, 거대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문 주변의 벽면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물쇠를 풀기 위해 마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평범한 잠금 마법이 아니었다. 분명, 평범한 이들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곳임을 명확히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호기심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 전생의 나는 닫힌 문을 보면 열어야 직성이 풀리는 프로그래머였으니까. 나는 자물쇠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마법 인장이 보였다. 마법으로 여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열리는 방식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인장들을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마나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리고 문득, 하나의 인장이 다른 인장들보다 미묘하게 어긋나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버그였다. 시스템의 허점. 나는 손가락 끝에 약한 마나를 집중시켜 그 어긋난 인장을 건드렸다.

크아앙!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철문 전체가 진동하더니, 거대한 자물쇠가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녹슨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열렸다. 어둠 속에서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훅 끼쳐 왔다. 동시에,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질적인 마나 파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그건 단순한 마나의 흐름이 아니었다. 슬픔, 절망, 분노, 그리고… 끝없는 허기.

나는 반사적으로 손끝에 작은 빛의 마법을 띄웠다. 어둠 속에서 작은 광구가 만들어져 주위를 밝혔다. 문 안쪽은 길고 좁은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은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벽면은 습기로 가득했고, 이끼가 잔뜩 껴 있었다. 퀴퀴하고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참을 내려갔을까.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작은 방이 나타났다. 방은 원형이었고, 벽면에는 고대의 언어로 보이는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닳고 닳은 낡은 석판이 놓여 있었다. 검은색 오석 같은 재질의 석판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밋밋했지만, 그것만이 이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피사체였다. 그리고 그 석판에서, 내가 쫓아왔던 그 이질적인 마나의 파동이 가장 강하게,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석판에 다가갔다. 석판 주변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훨씬 차갑고 무거웠다. 손을 뻗어 석판을 만져보려 했다. 그때였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내 정신을 강타하는 듯한 감각. 그건 음성이라기보다는 파동에 가까웠다. 끔찍한 고통, 처절한 비명,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절규. 내 머릿속에서 모든 감각이 뒤섞이며 맹렬한 폭풍을 일으켰다. 벽면의 고대 문자들은 석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에 반응하는 듯,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깜빡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가운 속삭임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굶주려 있다… 존재의 근원을… 갈망한다….*

나는 비틀거리며 석판에서 물러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마법 유물이 아니었다. 이건…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혹은, 무언가를 가두어 둔 봉인석.

이 모든 것이 엘드리안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가장 빛나는 학원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도대체 무엇을 위한, 혹은 누구를 위한 금기란 말인가.

“이게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엘드리안 학원?”

나의 눈은 공포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담은 채, 다시 한번 낡은 석판을 향했다. 학원의 명성 아래에 감춰진 심연의 진실이, 이제 막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