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재의 잿빛 하늘 아래, 낡은 장벽 도시 ‘새벽’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아린. 스무 해 남짓 살아온 날들 중 절반은 잔해 속을 헤매며 생존의 조각을 줍는 일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폐허가 된 병원에서 아직 쓸 만한 항생제 몇 알과 녹슨 나이프 한 자루를 찾아냈다. 이만하면 오늘의 수확으로는 충분했다.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빠져나오려는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기척이 덮쳐왔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내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뭉개버렸다. 변이된 들개였다. 등허리에는 뼈가 튀어나와 있었고, 이빨은 비정상적으로 길고 날카로웠다. 놈의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다.

“젠장!”

낡은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이런 놈은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제 찾은 통조림을 먹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놈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빨이 내 어깨를 스치는 아픔이 느껴졌다. 뜨거운 피가 옷깃을 적셨다.

바로 그때였다.

숲의 그림자 속에서 섬광처럼 빠져나온 검은 형체가 들개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들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땅바닥을 긁으며 멈췄다. 녀석의 옆구리에는 길고 날카로운 뼈 송곳이 박혀 있었다.

내 눈앞에 선 존재는 내가 알던 그 어떤 생물과도 달랐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키는 훨씬 크고 몸은 가늘었다. 피부는 어둠처럼 검푸른 빛을 띠었고, 뼈대가 드러난 듯 날렵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눈이었다. 깊은 밤하늘처럼 검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은빛이 아롱거렸다. 그는 ‘어스름족’이었다. 새벽 도시에서 아이들에게 밤마다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 속의 괴물,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숲의 망령.

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나이프를 쥔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다가오지 마.”

내 목소리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 작았다. 어스름족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들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눈빛이 담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압도될 뿐이었다.

그때, 변이된 들개가 마지막 발악처럼 몸을 뒤틀며 어스름족의 다리를 물려고 했다. 어스름족은 미동도 없이 그저 들개를 바라보았다. 들개의 이빨이 닿기 직전, 그는 섬광처럼 발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짓밟았다.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들개는 미동도 없이 축 늘어졌다.

그는 피 묻은 발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 검푸른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나는 죽음을 예감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차라리 들개에게 죽는 게 나았을까? 적어도 그 놈은 인간이었다면 상상할 수 있는 공포의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길고 얇은 덩굴 같은 것을 꺼냈다. 그 덩굴 끝에는 녹색 이파리 몇 개가 달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뭐지?”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어스름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내가 난생 처음 듣는 이상한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 소리 같기도, 깊은 샘물 소리 같기도 했다. 알 수 없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덩굴을 내 어깨 상처에 가져다 댔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뭐 하는 거야? 다가오지 마!”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덩굴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두드린 다음 덩굴을 가리켰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상처에 좋다는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도시의 의약품도 귀한 상황에서, 이런 야생 풀떼기가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하지만 놈이 나를 해치려 했다면 벌써 끝났을 것이다. 혹시… 치료를 해주려는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름족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상처에 덩굴 잎을 붙였다. 놀랍게도, 차가운 잎사귀가 닿자마자 타는 듯한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잎사귀는 녹색 빛을 내며 상처를 감쌌고, 끈적이는 진물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야?”

그는 작은 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답했다.

“…치유.”

그의 목소리에서 놀랍게도 인간의 언어가 섞여 나왔다. 나는 경악했다. 어스름족은 말을 하지 못하는 괴물이 아니었던가? 새벽 도시의 어른들은 그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라고 했다.

“너… 너 한국말 할 수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

그의 발음은 서툴렀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어깨에 붙은 잎사귀는 점차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아픔이 사라지고,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피부가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이름은 아린이야.”

“카이.”

그는 짧게 답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깊은 밤하늘 같았지만, 이제는 공포가 아닌 묘한 호기심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나는 폐허에서 식량을 찾다가, 그는 숲의 경계를 순찰하다가. 서로를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이전처럼 도망치거나 숨지 않았다. 우리는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그는 나에게 숲의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어떤 풀이 약이 되고, 어떤 열매가 독이 없는지. 그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흙의 냄새를 맡고,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숲 그 자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도시의 잔해 속에서 찾은 낡은 책들을 읽어주었다. 인간의 역사, 멸망 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 그는 그 이야기를 흡수하듯 들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다양한 표정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단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나와 같은 지성과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내가 도시의 잔해 속에서 낡은 그림책 한 권을 찾아냈다. 색 바랜 표지에는 아이와 강아지가 뛰어노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카이가 물었다.

“옛날에 사람들이 키우던 동물이야. 강아지라고 해. 충성스럽고, 인간을 잘 따랐대.”

그는 그림 속 강아지의 털을 만져보는 시늉을 했다.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스쳤다.

“우리 부족은… 인간의 냄새를 싫어해. 파괴와 오염의 냄새.”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남긴 상처는 너무나 컸다.

“어스름족도… 옛날엔 인간이랑 친했대?”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숲 깊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래 전에는… 그랬을지도.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인간은 우리의 땅을 망가뜨렸고, 우리의 존재를 위협했어. 우리는 숨었고, 인간은 우리를 사냥했어. 공존은 불가능해.”

나는 그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새벽 도시의 사람들은 어스름족을 ‘돌연변이’, ‘괴물’이라 부르며 증오했다. 그들을 마주치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카이의 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명백한 금기였다. 새벽 도시의 정찰병들에게 발각되면 나는 즉시 처형당할 것이고, 카이는 끔찍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의 부족에게 발각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이끌렸다. 숲속 깊은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샘터에서 우리는 만났다. 차가운 물줄기 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감싸주었다. 나는 그에게 도시의 슬픔을, 사람들의 절망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에게 숲의 고요함과, 숲의 생명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지 이야기했다.

“아린, 너는… 도시에 살 수 있니?”

어느 날, 카이가 물었다. 그의 질문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살아야지. 다른 곳은 없어.”

“너의 눈에는… 도시의 잿빛이 가득해.”

그의 손이 내 눈가를 스쳤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닿은 곳은 뜨거웠다.

“너의 눈에는… 숲의 푸른 빛이 가득해.”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단단했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우리의 피부색은 극명하게 달랐다. 나의 창백한 살결과 그의 검푸른 피부. 하지만 잡힌 손의 온기는 같았다.

“카이… 우리 이렇게 계속 만날 수 없을 거야.”

나는 결국 그 말을 꺼냈다. 현실은 잔인했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까지고 비밀로 유지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들킬 것이고, 그때는 파멸뿐이었다.

카이는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어둠이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나는… 너를 떠날 수 없어.”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숲의 바위처럼 굳건했다.

“나도… 너를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몸에서는 흙과 나무와 풀의 냄새가 났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의 금속과 먼지 냄새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의 냄새였다. 그의 심장이 내 귀에 쿵쿵거렸다. 인간의 심장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새벽 도시의 경보음이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숲을 갈랐다. 동시에 숲의 깊은 곳에서도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내가 물었다.

카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간들이… 우리 영역으로 침범했어.”

“뭐? 왜?”

“모르겠어. 하지만… 사냥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우리는 동시에 움직였다. 나는 새벽 도시의 경보가 울리는 방향으로, 카이는 숲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카이! 조심해!”

내가 외치자 그가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린! 도망쳐!”

우리는 숲의 가장자리, 인간의 영역과 어스름족의 영역이 만나는 경계에서 다시 만났다. 상황은 아수라장이었다. 새벽 도시의 정찰대가 어스름족의 사냥꾼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짐승의 포효 같은 어스름족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바위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우리의 만남이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곳에 함께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이가 보였다.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인간 정찰병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빠르고 정확해서,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는 살생을 피하려는 듯 보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제압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인간 정찰병들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한 정찰병이 카이의 등 뒤로 칼을 꽂으려는 순간, 나는 뛰쳐나갔다.

“안 돼!”

내 비명 소리에 정찰병이 나를 돌아보았다. 카이도 놀란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 찰나의 순간, 다른 정찰병의 총탄이 카이의 어깨를 스쳤다. 그는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다.

“카이!”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정찰병들이 나를 붙잡으려 했다.

“이 여자가! 어스름족과 내통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나는…!”

나는 필사적으로 카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깨를 부여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혼란과 고통, 그리고 알 수 없는 결정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카이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번에는 굳건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가자.”

그는 짧게 말하며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는 정찰병들의 포위망을 뚫고 숲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으로.”

우리는 숲 속으로, 어둠 속으로, 모든 금기를 넘어섰다. 새벽 도시의 빛도, 어스름족의 경계도 넘어선 곳으로. 이제 우리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모든 이에게 배척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은 놓지 않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내 손에 잡힌 그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나와 다르지 않은, 생명의 고동.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기댔다. 숲은 고요했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두렵지 않아?” 내가 속삭였다.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너와 함께라면… 괜찮아.”

그의 말에 나는 미소 지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생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종족의 울타리를 넘어선 두 존재가, 오직 서로에게 의지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