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침낭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멘트 벽의 냉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어제 주운 깡통 수프 반쪽으로 겨우 허기를 달랬지만, 여전히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낡은 상점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잿빛 하늘이 드러났다. 여전히 해는 뜨지 않은 것 같은 어스름. 언제부터인가 이 도시는 영원히 새벽에 갇힌 듯했다. 먼지와 재로 뒤덮인 세상은 희미한 빛마저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목이 칼칼했다. 어제 모아둔 빗물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오늘도 물을 찾아 나서야 했다.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생존의 굴레.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낡은 철제 선반 위에는 어설프게 모아둔 생필품들이 놓여 있었다. 찢어진 배낭, 녹슨 칼, 그리고 이제는 거의 내용물이 없는 구급상자. 전부 어디선가 주워온 것들이다. 소중한 생존 도구이자, 동시에 무거운 짐이었다.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날카롭게 갈아둔 칼날이 희미한 빛을 반사했다. 날마다 녹을 닦고 날을 세웠다. 이 칼은 그의 유일한 벗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배낭을 짊어지고, 조심스럽게 상점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삭막한 거리에 울려 퍼졌다.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이 불어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위에서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굴러다니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어떤 짐승인지, 어떤 변이를 겪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주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훈은 익숙하게 주변을 살폈다. 주차되어 있던 녹슨 차들은 제자리에서 시체처럼 굳어 있었고, 유리창이 깨진 건물들은 텅 빈 눈동자처럼 세상을 응시했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이 도로는 이제 그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리는 삭막한 골목이 되었다.
오늘의 목표는 북쪽 구역에 있는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예전에는 제법 부유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 어쩌면 아직 쓸만한 물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희망은 대부분 절망으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젠장, 춥네.”
얇은 재킷을 여몄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해가 뜨지 않는 세상은 언제나 서늘했다. 습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들었다.
골목을 돌아 모퉁이를 꺾었다.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너진 버스 정류장,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간판들. 그리고 길바닥에 널브러진 뼈들.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이제는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해져야만 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파트 단지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간밤에 무너진 듯한 건물 잔해가 길을 막고 있었고, 붕괴 위험 표지판이 세워져 있던 곳은 아예 거대한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우회로를 찾았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희미한 햇살이 구름 사이로 잠시 비쳤다. 잿빛 하늘에 작은 틈이 생긴 것이다. 눈부신 빛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햇살인가. 하지만 그 빛은 찰나에 불과했고, 이내 다시 세상은 어둠과 재 속에 잠겼다.
“이 빌어먹을 세상.”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망한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무력감은 그의 생존 의지를 갉아먹는 가장 큰 적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놀이터에는 녹슨 그네와 미끄럼틀이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된 곳. 이곳에 남은 건 오직 적막과 파괴뿐이었다.
그는 가장 높은 건물로 향했다. 고층 아파트는 대개 수도 시설이나 비상 식량이 잘 보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만큼 위험도 따랐다. 짐승들이나 다른 생존자들이 먼저 훑고 지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건물 로비는 이미 박살 나 있었다. 뼈대만 남은 안내 데스크와 뒹굴어 다니는 흙먼지. 엘리베이터는 멈춘 지 오래였고, 비상계단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훈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심장이 쿵쾅거렸다. 긴장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어둠은 항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었다.
10층, 11층… 20층. 지훈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다른 생존자들은 접근을 포기했을 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무것도 없을 가능성도 높았다.
25층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희미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시큼하고 역겨운, 그러나 익숙한 냄새. 썩은 살점 냄새.
몸을 바짝 숙여 숨소리마저 죽였다. 칼을 고쳐 쥐고, 천천히 주변을 탐색했다. 냄새는 25층 복도 끝에서 나는 것 같았다. 폐허가 된 아파트 복도는 으스스한 그림자로 가득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먼지 쌓인 바닥을 비출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아니, 시체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이라고 부르기 힘든 존재였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피부는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고, 끔찍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옷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고, 몸 곳곳에는 끔찍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광경은 수없이 봤지만, 볼 때마다 적응되지 않았다. 아니, 적응해서는 안 되었다. 적응하는 순간, 자신도 저렇게 변해버릴 것 같았다.
그것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듯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 옆에는 찢겨진 배낭과 엎질러진 물통이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저 존재는 물을 찾아 헤매다 결국 이곳에서 쓰러진 것이리라.
한숨을 쉬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고, 죽은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시신을 지나쳐 복도를 마저 탐색했다. 이 층에는 딱 두 가구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이미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한 가구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지훈은 닫힌 문 앞에 섰다. 낡은 현관문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굳게 잠겨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는 걸까? 아니면 잠시 비워둔 것일까?
그는 귀를 문에 바짝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살아있는 인기척은커녕, 죽은 것들의 기척조차 없었다.
배낭에서 낡은 드라이버와 얇은 철사를 꺼냈다. 능숙하게 자물쇠를 풀기 시작했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는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지훈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현관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코끝에 희미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아주 오래된 먼지 냄새가 풍겼다.
거실은 비교적 깨끗했다. 다른 집들처럼 약탈당한 흔적은 없었다. 소파와 테이블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벽에는 낡은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가족사진이었다. 환하게 웃는 부부와 어린 아이의 모습.
지훈은 잠시 그 사진을 응시했다. 이 사진 속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살아남았을까, 아니면 복도 끝의 시체처럼 변했을까.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침실, 작은방, 욕실, 그리고 부엌.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부엌 찬장을 열었을 때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반 구석에 놓여 있는 녹슨 깡통 몇 개. 그리고 마른 과자 봉지 하나. 썩지 않은 밀봉된 음식이었다. 기적이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깡통과 과자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닦아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났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건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망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철컥.
누군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였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칼을 움켜쥐고 몸을 돌렸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그림자 같은 형체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눈. 그리고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기형적인 형체.
그것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먹이를 쫓아 헤맨 짐승처럼.
지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치켜들었다.
“젠장.”
어둠 속에서, 그는 간신히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