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사방에 깔린 잿빛 먼지를 휘감아 올렸다. 한때 수려한 대나무 숲을 자랑했던 이곳은 이제 부러진 줄기와 바싹 마른 잎사귀만이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었다. 칠흑 같은 재앙이 세상을 덮친 지 어언 3년. 생존자들의 눈빛에는 절망과 체념이 깃들어 있었지만, 한곳에 모인 강호인들의 시선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했다.
이곳, 한때 무림의 성지라 불리던 송무산(松武山)의 폐허에,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가 열렸다.
“흐읍, 흐읍…”
백무진(白武眞)은 거친 숨을 내쉬며 산비탈을 올랐다. 닳아빠진 무복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며칠 밤낮을 헤맨 피로가 역력했다.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오늘, 이곳 송무산에 모인 모든 문파의 고수들 중 가장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단단했다.
광장에 다다르자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강호가 떨던 구파일방(九派一幇)의 문주들부터, 은둔 고수, 혹은 이름 없는 무인들까지. 그들의 기운이 뿜어내는 압력은 그 어떤 강시(殭屍)의 무리보다도 위압적이었다. 특히 전방에는 푸른 도포를 입은 중년 사내, 화산파의 문주 ‘청룡검(靑龍劍)’ 이청운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현수막에는 먹으로 쓰인 강렬한 글씨가 펄럭였다.
‘천하무림대회(天下武林大會) – 중원 재건(中原再建)의 기틀을 마련하라!’
백무진은 그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재건이라니. 이미 강시들의 발굽 아래 모든 것이 무너진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재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에게는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간 스승의 마지막 유언. 그리고… 지키지 못했던 이름 없는 마을 사람들의 한(恨).
“허허, 백 사형께서도 오셨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무진이 몸을 돌렸다. 구화산(九華山)의 장문인, 능운자(凌雲子)였다. 그는 백무진의 스승과 막역한 사이였지만, 백무진 본인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능운자는 여전히 후덕한 인상이었지만, 수척해진 얼굴은 세상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능운 장문인.” 백무진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정말 용케 살아남았군. 소문으로는 자네 문파의 모든 이들이… 아니, 됐다. 어쨌든 잘 왔다. 대회가 곧 시작될 걸세.” 능운자의 시선은 백무진의 초라한 행색에 잠시 머물렀으나, 이내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무리가 다가왔다.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그 가운데 한 명이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비단으로 치장하고, 허리에는 화려한 용문(龍紋) 장식이 새겨진 검을 찬 사내. 그는 바로 오대세가(五大世家) 중 하나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차남, ‘천뢰검(天雷劍)’ 남궁혁(南宮赫)이었다. 그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무림인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남궁혁은 오만한 시선으로 좌중을 한 번 훑더니, 백무진의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흥, 보잘것없는 잡배들도 천하의 운명을 논하겠다고 기어나왔군. 꼴이 말이 아니다. 강시 떼에게 먹히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로군.”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백무진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돌려 남궁혁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남궁혁은 그런 백무진의 태도에 더욱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찮은 것. 일전에 네놈 문파의 놈들이 감히 내 심기를 거슬렀지. 이번 대회에서 만나면, 그 업보를 제대로 치르게 해주마.” 남궁혁은 거친 말을 내뱉으며 지나쳤다. 그의 뒤를 따르던 호위 무사들은 백무진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능운자가 한숨을 쉬었다. “남궁세가는 재앙 속에서도 세력을 굳건히 유지했지. 그들의 오만함이 더욱 심해진 듯하네. 자네도 조심하게.”
백무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 그에게는 조심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 그것만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대회 광장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제단 위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의 수염이 허리까지 내려온 그는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를 아우르는 무림 연합의 총장(總長)이자,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절벽검신(絶壁劍神)’ 현오자(玄悟子)였다. 그의 등장에 모든 무림인들이 숙연해졌다.
현오자의 깊은 눈동자가 좌중을 한 번 훑었다. 그의 목소리는 늙었지만 힘이 있었다.
“강호의 모든 영웅호걸들이여. 우리는 잃어버린 땅에서, 잃어버린 생명을 애도하며, 이 자리에 모였다.” 현오자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저 썩어 문드러진 것들, 강시들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수많은 문파가 스러지고, 강호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현오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잿빛 구름과 함께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좌절할 수 없다. 우리 무림인들은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마지막까지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천하무림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다. 재앙 속에서 새로운 중원을 이끌어갈 단 한 명의 ‘무림 지존(武林至尊)’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무림 지존. 그 말에 모든 무인들의 눈빛에 욕망과 투지가 번뜩였다. 단 한 명만이 천하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었다.
“대회는 크게 세 가지 관문으로 나뉜다. 첫째, ‘강시 토벌전’. 송무산 일대에 창궐하는 강시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지 겨룰 것이다. 단순한 힘이 아닌, 기지와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 ‘강호 논검’. 무인들 간의 비무를 통해 진정한 무위를 가린다. 마지막 셋째, ‘천무령(天武令) 쟁탈전’. 송무산 정상에 봉인된 천무령을 획득하는 자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이다.”
천무령. 전설에 따르면 천무령은 고대 무림의 지존들이 지녔던 신물로, 천하의 모든 무인을 호령할 수 있는 권능을 지녔다고 했다. 백무진은 천무령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그런 허황된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강시 토벌전’이라는 말에 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빌어먹을 괴물들.
“이 대회의 승자는 무림 지존으로서 모든 문파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며, 중원 재건을 위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송무산에 봉인된 고대 문헌을 해독하여, 강시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강시를 완전히 소멸시킬 방법. 그 말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백무진의 심장에 작은 불꽃을 지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그 빌어먹을 괴물들에게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현오자의 연설이 끝나자, 수많은 무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강시와의 싸움, 그리고 무인들 간의 경쟁. 그 모든 것이 합쳐진 피 튀기는 대회가 될 것이 분명했다.
“첫 번째 관문, 강시 토벌전의 규칙을 설명하겠다.” 현오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송무산의 동쪽, ‘묵죽림(墨竹林)’으로 향하라. 그곳에 널린 강시들을 척살하고, 강시의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진액(眞液)’을 최대한 많이 가져오는 자가 높은 점수를 얻을 것이다. 허나 명심하라! 묵죽림 깊숙한 곳에는 일반 강시와는 차원이 다른 ‘특수 강시’가 출몰한다. 무모하게 나서다간 목숨을 잃을 것이다.”
특수 강시. 백무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수많은 특수 강시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흡사 무공을 익힌 듯한 움직임과 강한 기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 이제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라! 30분 뒤, 첫 번째 관문이 시작될 것이다!”
현오자의 선언과 함께, 대회 광장은 거대한 전장으로 변모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혹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묵죽림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백무진은 허리춤의 녹슨 단검을 만졌다. 그에게는 화려한 무공도, 이름 높은 문파의 배경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강함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백무진은 말없이 묵죽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초라한 뒷모습에서, 이제 막 피어나는 강인한 의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