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간의 기록고 (1)**
어둠은 끈적했고, 공기는 먼지와 곰팡이 냄새로 무거웠다.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메아리치며 웅장하지만 잊힌 공간의 깊이를 알렸다. 고고학 파티 ‘새벽별’은 이곳, 한때 위대한 문명의 지식 창고였으나 지금은 던전의 일부가 된 ‘시간의 기록고’ 심층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파티 리더 한태성은 단단한 철제 부츠로 묵직하게 바닥을 딛었다. 그의 거대한 양손 도끼가 등 뒤에서 빛을 반사했고, 강렬한 시선은 거미줄과 덩굴로 뒤덮인 낡은 석벽을 훑었다. “이봐, 서연. 여긴 마력 기류가 유난히 복잡해. 혹시 모르니 항상 정신 집중하고 있어.”
힐러 서연은 가냘픈 손으로 지팡이를 고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성님. 이상한 기운은 없어요. 다만… 조금 섬뜩해요.”
“쫄지 마, 서연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딜러 민아가 허리에 찬 단검의 손잡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여태껏 못 헤쳐나온 던전 없었잖아?”
탱커 준혁은 묵묵히 앞장서서 방패로 길을 막는 넝쿨들을 밀어냈다. 그의 굳건한 등은 언제나 파티의 방패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 파티의 가장 조용한 그림자, 강진우가 있었다. 진우는 허리춤의 단검 외에는 특별한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의 무기는 날카로운 눈과 그 안에 담긴 분석적인 사고였다. 그는 낡은 벽돌 하나, 바닥의 미묘한 금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잠깐.” 진우의 목소리가 복도에 낮게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여기… 무언가 달라요.”
“또 그놈의 촉이야, 진우?” 민아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뭐가 다른데? 그냥 오래된 돌덩이 아니야?”
진우는 민아의 말을 무시하고 한쪽 벽에 바싹 다가섰다. 손가락으로 벽돌 사이의 미세한 틈을 더듬었다. “이 벽은 다른 벽과 재질이 달라요. 그리고… 이 틈새.”
한태성이 흥미롭다는 듯 다가왔다. “오호, 탐색가 강진우님께서 뭔가를 발견하셨나? 어디 보자.” 태성은 진우가 가리킨 틈을 살펴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런 게 한두 군데인가. 그저 세월의 흔적이겠지.”
“아니요.” 진우는 단호했다. “이 틈은 자연적인 풍화가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벌어진 흔적입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마력 반응이 느껴져요. 방금 전까지 작동하고 있었던 마법의 잔류.”
“마법이라고?” 서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비밀 통로인가요?”
태성의 눈빛이 번뜩였다. “비밀 통로라… 진우, 네 촉이 맞았으면 좋겠군. 자, 민아! 준혁! 이 벽을 열어본다!”
준혁이 거대한 방패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벽을 밀었다. 틈새가 조금 더 벌어지는가 싶더니,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뒤섞인 먼지와 함께 드러난 것은 또 다른 복도였다.
“젠장, 함정은 아니겠지?” 민아가 경계하며 단검을 뽑았다.
“함정이라면 벌써 발동했겠지.” 태성은 대범하게 앞장서서 무너진 벽 너머로 들어섰다. “좋아, 내가 먼저 들어가지. 너희는 뒤따라와라. 진우, 너는 항상 그랬듯이 가장 뒤에서 주변을 잘 살펴보고.”
태성은 좁은 복도를 따라 몇 걸음 들어섰다. 이 복도는 이전의 그것보다 훨씬 깨끗했고, 벽에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 단 하나의 낡은 나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위에는 붉은색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마법으로 봉인된 문인가?” 준혁이 의아해했다.
태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아마도 이 기록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는 문이겠지. 이런 곳에 오면 역시 한 방이 있어야 제맛이야. 내가 열어보지.”
태성은 대담하게 문으로 다가갔다. 다른 파티원들이 긴장하며 그를 지켜봤다. 그는 마법진이 새겨진 문을 만지자, 문틈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젠장, 뭔데 이렇게 쉽게 열려?” 민아가 중얼거렸다.
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문틈으로 먼저 들어섰다. “뭐, 실력의 차이겠지. 너희도 들어와! 조심해!”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메아리쳤고,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크헉…!”
“태성님!” 서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파티원들은 서둘러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본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방은 원형이었다. 사방에는 빽빽한 책장들이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돌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돌 테이블 위에, 한태성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낯선 검은색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칼자루에는 기이한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이건 무슨…!” 민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태성님! 태성님!” 서연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서 치유의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태성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이미 생명은 희미하게 꺼져가고 있었다. “안 돼요… 이미 늦었어요…!”
준혁은 분노에 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누구냐! 대체 누가 이 짓을 한 거야!”
하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창문도 없었고, 다른 출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들어온 문만이 유일한 통로였다. 그 문은 이제 열린 채로 있었다.
“말도 안 돼…” 민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뒤따라 들어왔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어. 대체… 대체 누가 이 방에 있었단 말이야?”
모두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방 안을 채웠다. 파티원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 누구도 태성보다 먼저 방에 들어간 이는 없었다. 그리고 태성이 들어간 직후, 그들이 뒤따라 들어왔을 뿐이었다.
“밀실 살인…” 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냉철했다. “정확히는, 아무도 없는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인가.”
그의 시선이 죽은 태성의 시체, 그리고 그의 등에 박힌 낯선 단검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훑자,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국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방 안에는 우리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준혁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범인은 우리 중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태성의 시체 너머, 벽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를 향했다. “아직은 그렇게 단정할 수 없죠. 적어도… 눈에 보이는 범인은 없을 겁니다.”
그는 태피스트리 뒤쪽 벽에 무언가에 스치듯 생긴 희미한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누군가가 급하게 무언가를 숨기려 한 듯,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평범한 던전 바닥의 돌멩이 같았지만, 진우의 눈에는 달랐다.
그는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돌멩이 한쪽 면에는 마치 칼날에 긁힌 듯한 미세한 상처가 나 있었고, 아주 희미한 붉은색 이물질이 묻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그 이물질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풍겼다.
“이건… 태성님의 피와 섞여 있어요.” 진우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데!” 민아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범인이 누구인지나 밝혀내! 아니면 우리 전부 여기서 영원히 갇히게 될 거야!”
진우는 대답 대신, 돌멩이를 손에 쥔 채 문 쪽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문턱 아래, 빛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틈새에 박혔다.
그곳에, 누군가의 덧신이 살짝 스친 듯한 희미한 흙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국은… 문 안쪽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범인은 이 방 안에 없었습니다.” 진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범인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에 쥔 돌멩이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보다는… 무언가 *던져진* 흔적이겠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던져졌다고?
진우는 다시 시체에 박힌 단검을 응시했다. 그리고 방금 주운 돌멩이와 단검 손잡이의 붉은 문양을 번갈아 봤다. 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빠르게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준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우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천장을 올려다봤다. 낡은 석판들이 촘촘히 박힌 천장 한가운데, 유난히 깨끗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깨끗한 부분의 한 귀퉁이에, 아주 작은 틈이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벌어져 있었다.
그 틈새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밀실은… 아니었군.” 진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적어도, 완벽한 밀실은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