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틀린 회랑의 속삭임 (62화)
잿빛 하늘은 핏물이라도 섞인 듯 탁한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태양은 희미한 원형의 잔상으로만 존재할 뿐, 그 어떤 온기도 세상에 뿌리지 못했다. 재하는 갈라진 아스팔트 위를 걷는 대신, 낡은 백화점 건물의 뼈대 사이로 난 어둠침침한 샛길을 택했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철근이 부러진 듯한 비명 소리가 그의 귓가를 찢었다. 붕괴된 도시의 잔해는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앙상한 갈비뼈 같았고, 그 사이를 지나는 자신은 그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벌레 같은 기분이었다.
“젠장, 또 헛걸음인가.”
낮게 중얼거렸다. 보름 전, 수집가 길드에서 얻은 낡은 지도는 이 폐허 한복판에 아직 ‘보급 연구소’라는 곳이 온전히 남아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물론, 그 지도가 그려진 시점은 대재앙이 터지기 최소 오십 년 전이니, 온전히 남아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그러나 재하는 절박했다. 그의 등 뒤에 짊어진 배낭 속엔 며칠 치 식량과 부서진 ‘정수 필터’ 뿐이었다. 지난번 탐사에서 어렵게 구한 항생제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동굴 속 거처에 홀로 남겨진 어린 동생은 점점 기침을 심하게 했다.
부식된 철골 사이를 기어 다니는 넝쿨들이 기분 나쁜 녹색으로 번져 있었다. 마치 썩어가는 시체의 내장을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식물들과는 다르게, 이 넝쿨들은 햇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기괴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습한 흙과 알 수 없는 화학약품이 뒤섞인 듯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재하는 재빨리 낡은 방독면을 고쳐 썼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더욱 흐릿하고 왜곡되어 보였다.
목표로 삼은 ‘보급 연구소’는 이 지역의 옛 중앙 도서관 지하에 위치한다고 했다. 왜 도서관 지하에 보급 연구소가 있었는지, 지도를 그린 자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미친 자의 헛소리를 믿고 온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도서관 입구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녹슨 철골들이 뒤섞여 있었다. 재하는 겨우 몸을 굽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내부는 예상대로 암흑천지였다. 손전등을 켰다. 텅 빈 공간에 빛이 닿자,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듯 흩어졌다.
“우욱….”
습기와 곰팡이, 그리고 뭔지 모를 끈적한 냄새가 한꺼번에 폐 속으로 들이쳤다. 재하는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벽은 온통 검붉은 반점들로 얼룩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이곳에서 피를 토하고 간 것 같았다. 천장은 뜯겨 나갔고, 군데군데 철근이 뼈대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삐이이익-
어디선가 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쥐라기엔 너무나 크고 끈적한 소리였다. 재하는 즉시 손전등을 껐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소리의 근원지를 가늠했다. 저 안쪽, 어둠 저편이었다.
다시 손전등을 켰을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너진 서가와 바닥에 뒹구는 찢어진 책들이 아니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곰팡이들이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곰팡이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곰팡이들 사이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새겼다기엔 너무나 불규칙하고도 정교한 형태였다.
“제기랄… 여기도 저주받은 곳이었군.”
그는 욕설을 씹어뱉었다. 이 문양들. 재하는 이것들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폐기된 고서적들 속에서, 아니면 환영 속에서.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후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발걸음을 옮겼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축축한 것이 발에 밟혔다.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역한 비린내가 올라왔다. 손전등을 비추자, 수많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벌레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인 형태들이었다. 다리가 열두 개나 달린 검은 딱정벌레, 거대한 애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것들, 그리고 뭉개진 인간의 손가락 마디 같은 것들…
재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서관 안내도 표지판을 찾았다. 부식된 표지판에는 ‘자료 보관소’, ‘열람실’, 그리고 가장 아래 ‘지하 연구동’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지하 연구동. 지도가 말했던 그곳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그 흔적만 겨우 남아 있었다. 그는 로프를 꺼내 안전할 것 같은 기둥에 묶었다.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아래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치 수십 마리의 벌레들이 동시에 기어가는 듯한, 으스스한 마찰음이었다.
바닥에 발이 닿자, 차가운 습기가 온몸을 감쌌다. 재하는 손전등을 사방으로 비췄다.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벽은 지하에서부터 솟아난 것 같은 검붉은 곰팡이들로 뒤덮여 있었다. 곰팡이들은 심지어 벽을 넘어 천장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곰팡이들이 마치 거대한 꽃잎처럼 겹겹이 피어난 듯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끈적하게 고여 있었다.
그 순간, 재하의 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 *그는… 깨어날 것이다…*
환청인가? 아니면…? 소리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마치 그의 뇌 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다.
재하는 몸을 움찔 떨었다. 방독면 렌즈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자신이 미쳐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통로를 따라 걷자,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철문이 절반쯤 뜯겨 나간 연구실이었다. 안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직 전력이 살아있는 것인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연구실 내부는 처참했다. 책상들은 뒤집혀 있었고, 유리병 조각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한쪽 벽에는 정체불명의 장치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하나에서 푸른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낡은 모니터였다.
재하는 조심스럽게 모니터 쪽으로 다가갔다. 전원이 들어온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화면은 픽셀이 깨져 있었지만, 글자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파일 – 최종 보고서**]
[**날짜: 재앙 발생 D-7**]
[**프로젝트명: 심층 생태 연구 및…**]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꺼졌다. 재하는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모니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재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형체를 한 무언가였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피부는 끈적한 검붉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곰팡이 사이로 앙상한 뼈들이 튀어나와 있었고, 손가락은 기형적으로 길었다. 마치 수십 년간 굶주린 시체가 곰팡이에 잠식된 채 일어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 얼굴이라고 부르기 힘든 부위에는,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깊은 구멍만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재하는 그것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그것은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재하에게로 다가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고인 끈적한 액체가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재하는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낡은 샷건을 뽑아 들었다. 손은 격렬하게 떨렸다.
“오지 마…!”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가늘었다.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올렸다. 기형적인 손가락이 공기를 가르며 재하의 심장을 노리는 듯 움직였다.
재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굉음이 좁은 연구실을 뒤흔들었다. 총알은 정확히 그것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생명체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뚫린 부위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 구멍을 중심으로 곰팡이들이 더욱 빠르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재하가 다음 총알을 장전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썩은 살점과 곰팡이의 역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방독면은 무용지물이었다.
재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것의 길고 기형적인 손가락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뼈마디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숨이 막혀 왔다. 그의 시야는 점차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갔다.
그는 보았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그리고, 그의 귀에는 다시 그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 *그는… 깨어났다…*
그리고 재하의 정신은… **점점 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