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은 도시, 네온사인 간판들이 덧없이 깜빡이는 밤하늘 아래, 별빛처럼 반짝이는 소녀가 있었다. ‘새벽별의 수호자’ 세라.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은 밤하늘을 닮았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빛나는 마법진이 새겨진 은색 지팡이를 들고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늘 유진이 있었다. 세라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의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 유진은 어둠 속에서 세라를 지켜주는 그림자처럼, 때로는 힘든 싸움에 지쳐 쓰러지려는 세라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는 존재였다.
“괜찮아, 세라. 네 옆엔 내가 있잖아.”
유진의 목소리는 언제나 세라에게 힘이 되었다. 그녀의 미소는 세라가 세상을 구할 힘이 필요할 때마다 떠오르는 주문과도 같았다. 세라는 유진을 의심해 본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자신의 심장을 의심하지 않듯.
그날도 그랬다. 검은 기운이 도시를 집어삼키려 들 때, 세라는 온몸의 빛을 모아 맞섰다. 유진은 언제나처럼 세라의 뒤를 지키며 마력을 보조했다. 거대한 어둠의 심장이 눈앞에 드러났고, 세라는 마지막 빛의 일격을 준비했다. 온몸의 마력이 한 점으로 모여들며 빛의 창이 형성되는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감촉이 세라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악…!”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세라의 무릎이 꺾였다. 빛의 창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온몸을 휘감았던 새벽별의 마력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세라의 등 뒤에는 유진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세라의 마력이 흘러나오는 수정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 떠오른 비릿한 미소.
“유진…?”
세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혼란과 고통으로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유진의 얼굴은 낯설 정도로 차가웠다.
“미안해, 세라. 그 힘은… 내가 가져야 했어.”
유진의 눈빛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오직 탐욕과 갈망만이 번뜩였다. 세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새벽별의 마력이 마치 흡수되듯 유진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유진의 몸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고, 그녀는 세라가 가진 것보다 더 강력하고 오만한 빛을 내뿜었다.
“잘 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유진은 싸늘하게 속삭이며 세라를 어둠의 구덩이로 밀쳐 넣었다. 몸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 세라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빛나는 마법소녀가 되어 어둠을 소멸시키는 유진의 얄팍한 뒷모습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을 그녀의 모습이.
***
세라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몸은 만신창이였고, 마력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장이 찢어진 듯 아팠지만,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친구의 배신이었다. 유진. 그 이름 석 자가 피를 토하는 비명처럼 목구멍을 긁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지? 그녀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절규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절망의 끝에서, 세라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을 찢어놓은 것은 유진이었지만,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이 무기력한 절망감이었다. 분노가 피어올랐다. 새벽별의 수호자 세라는 죽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라가 태어났다.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잊혔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또 다른 힘이 고개를 들었다. 새벽별의 빛이 아니었다. 밤의 심연을 닮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의 기운. 복수. 오직 그 하나의 단어만이 그녀의 존재를 채웠다.
몸을 일으킨 세라의 눈은 더 이상 예전의 온화한 별빛이 아니었다. 차갑고 깊은 어둠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부서진 은색 지팡이는 날카로운 흑요석처럼 변해 있었다. 끝이 뾰족하고, 닿는 모든 것을 부술 것 같은 형상. 그녀의 드레스도 밤하늘처럼 검게 물들고, 날카로운 장식이 덧대어졌다.
“유진… 네가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나는 네게서 도로 빼앗을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세라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도시는 유진의 시대였다. 새벽별의 새로운 수호자 유진은 어둠을 물리친 영웅으로 찬양받았다. 그녀의 얼굴은 도시 곳곳에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빛의 여신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표면 아래, 어둠은 서서히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세라의 복수는 조용히, 그러나 무자비하게 시작되었다.
유진의 조력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들의 흔적은 마치 밤안개처럼 소멸했다.
새로운 힘을 얻은 세라는 그림자 속에서 유진이 쌓아 올린 탑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그녀의 어둠의 마력은 새벽별의 빛을 먹어치우며 더욱 강력해졌다. 세라의 손에 흑요석 지팡이가 번뜩일 때마다, 유진의 부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흡수되었다.
밤의 장막을 찢고 나타나는 세라의 모습은, 한때 빛의 수호자였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차가운 흑빛 기류를 두르고, 표정 없는 얼굴에는 오직 복수의 불꽃만이 이글거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밤의 마녀’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녀가 유진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의 잔혹함에 몸서리쳤다.
마침내, 유진의 가장 강력한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그녀는 이제 홀로 남았다.
세라는 유진이 처음 자신을 밀쳐 넣었던,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로 유진을 몰아넣었다. 한때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던 곳, 둘이 함께 마법 연습을 하던 추억의 장소가 이제는 생명 없는 돌무더기로 변해 있었다.
“세라…! 살아 있었을 줄이야!”
유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곧 경멸로 바뀌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겨우 목숨만 붙어있었을 줄이야. 그럼 그때 확실히 죽였어야 했는데.”
세라는 유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흑요석 지팡이를 유진에게 겨눌 뿐이었다.
“네가 가진 힘은… 나의 것이었어. 네게는 과분했지. 난 이 도시를 구하고 새로운 영웅이 되었어! 네가 사라진 덕분이야!” 유진은 광기 어린 눈으로 소리쳤다. “왜 다시 나타나서 이 모든 걸 망치려는 거지?”
“망쳐? 네가 나의 삶을, 나의 모든 것을 망쳤지.”
세라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차가워서, 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날 어둠 속에 버렸을 때, 나는 네 이름 세 글자를 곱씹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오직 너에게 이 고통을 돌려주기 위해.”
“하! 그래서, 그 어둠의 힘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새벽별의 수호자야! 네가 빼앗긴 그 힘을, 나는 완벽하게 다룰 수 있어!”
유진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세라의 것을 빼앗아 더욱 강력해진 새벽별의 마력이었다. 빛의 검이 유진의 손에 형성되고, 그녀는 맹렬하게 세라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번쩍!
빛과 어둠의 마력이 충돌하며 폐허는 진동했다. 유진의 빛은 맹렬하고 파괴적이었지만, 세라의 어둠은 집요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다. 유진은 자신이 빼앗은 힘으로 세라를 압도하려 했으나, 세라의 어둠은 유진의 빛을 꿰뚫고 파고들었다. 마치 새벽별의 빛이 처음부터 어둠 속에서 나왔다는 듯이.
세라는 유진의 일격을 피하며 흑요석 지팡이로 유진의 빛의 검을 쳐냈다.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유진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진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힘은… 내 거야!”
“네 것이라고? 거짓말로 훔친 것은 영원히 네 것이 될 수 없어.”
세라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마력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유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새벽별의 빛이 일그러지고,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비명을 질렀다. 몸속에 흐르던 마력이 고통스럽게 그녀를 찢는 듯했다.
“돌려줘…! 내 힘을 돌려줘!”
유진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세라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너에게 돌려줄 뿐이야.”
세라의 지팡이가 유진의 심장 앞에서 멈췄다. 흑요석의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피 한 방울을 맺히게 했다.
“죽이지 않을 거야.” 세라가 속삭였다. “그건 너무 쉬운 복수잖아?”
세라의 지팡이에서 마지막 칠흑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유진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유진의 몸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세라가 처음 빼앗겼던 새벽별의 마력이었다. 그 마력은 유진의 통제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흩어지더니, 세라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소멸했다.
“안 돼…! 안 돼…!”
유진은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때 이 도시를 빛으로 지배했던 영웅의 몸에는 이제 마법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뚱이만이 남았을 뿐.
세라는 유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가장 사랑했던 것, 네가 가장 탐냈던 것… 모든 것을 잃은 채, 이 폐허 속에서 살아남아. 그리고 평생 나를 기억해.”
어둠의 마력이 세라의 주변을 휘감았고,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에 남은 것은, 마력을 잃고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유진의 처량한 모습과, 한때 새벽별의 영광을 누리던 도시의 심장부에 드리운 깊은 밤의 장막뿐이었다. 세라는 복수를 이루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만족감도, 기쁨도 없었다. 그저 깊은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밤의 마녀는 이제, 영원히 어둠 속을 헤맬 것이다. 자신이 지켜주려 했던 빛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어둠이 되어버린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