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그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손에 들린 커피잔은 오래전에 식었고, 김은커녕 그 어떤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며칠 전, 그녀의 약혼자 준혁과 가장 친한 친구 유진의 ‘불륜’이라는 지극히 드라마틱하고 진부한 단어가 현실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눈물은 이미 말라붙어 더 이상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빈 머릿속으로, 앞으로 뭘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만이 맴돌았다.
“배신. 그렇게 믿었는데.”
나지막이 읊조린 말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지은은 한때 사랑했던 남자와 영원할 거라 믿었던 친구에게 한꺼번에 칼날이 박힌 기분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침대에 박혀 잠만 자고 싶었다.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싶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 침묵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눈물 나는 배신감은 그녀의 심장을 시꺼멓게 물들였고, 곧 처절한 복수심으로 변모했다.
그래, 이렇게 무너져 있을 수는 없어.
지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차갑고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복수. 하지만 어떻게? 그들을 똑같이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고, 통쾌하게.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처럼,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어 버릴 만한 그런 복수가 필요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그래, 그들보다 더 멋진 남자를 만나, 그들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거야!”
유치하다고? 그래, 유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굴욕은 없을 터였다. 자신들이 버린 여자가 더 좋은 남자와 훨씬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큼 처절한 복수는 없으리라. 문제는 ‘더 멋진 남자’를 어디서 찾느냐였다.
그때였다.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준혁의 회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업계의 잘 나가는 본부장, 도진이었다. 그와는 몇 번의 업무 미팅에서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었다. 준혁이 매번 그를 견제하며 신경 쓰던 모습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지은 씨. 도진입니다.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하지만, 지은 씨가 맡으셨던 프로젝트 자료가 필요해서요.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
지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신의 계시인가? 복수의 여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는 것만 같았다.
“네, 도진 본부장님. 괜찮습니다. 바로 보내드릴게요.”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자료만 보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
그날 저녁, 지은은 준혁과 유진이 자주 가던 고급 바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턱시도를 완벽하게 소화한 도진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지은은 오늘 도진에게 ‘가짜 연애 작전’을 제안했다. 처음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도진은, 준혁과 유진의 배신 이야기를 듣자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재밌겠네요. 저도 준혁 그 녀석, 딱히 마음에 드는 상대는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같은 업계라 얼굴 마주할 일 많을 텐데, 제대로 한 방 먹여줄 기회네요.”
그렇게 둘의 기막힌 복수극은 시작되었다.
“도진 씨, 저기 좀 보세요.” 지은이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고급스러운 바의 한쪽 구석, 예상대로 준혁과 유진이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유진은 준혁의 팔에 기댄 채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고 있었다. 지은의 심장이 다시 한번 아려왔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어이쿠, 저런. 제 약혼녀를 뺏어간 전 약혼자와 제 베스트 프렌드였던 사람이군요.” 도진이 비아냥거렸다.
지은은 도진의 팔에 더 바짝 기댔다.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행복해 보이는 게 중요해요.”
“걱정 마십시오, 지은 씨. 제가 이 구역 로맨틱 코미디 남주 연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도진이 씨익 웃으며 지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길은 예상치 못하게 따뜻했다.
준혁과 유진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혁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지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머, 준혁 씨! 유진아, 여기서 보네?” 지은이 과장된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마치 그들이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듯, 낯선 이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유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지은아… 여긴…?”
“아, 소개가 늦었네요. 여기는 내 새 남자친구, 도진 씨예요. 도진 씨, 이쪽은 제 친구였던 유진이랑, 전 약혼자였던 준혁 씨예요.” 지은은 ‘친구였던’, ‘전 약혼자였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도진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은 씨 남자친구, 도진입니다. 준혁 씨, 유진 씨,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워낙 업계가 좁아서요.”
준혁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도진은 업계에서 그야말로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능력, 외모, 재력 모든 것을 갖춘 인물. 그런 그가 지은의 남자친구라니.
“지은아, 설마… 너 지금 복수하려는 거야?” 유진이 속삭이듯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스쳤다.
지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복수라니, 유진아. 내가 왜? 그냥 새로운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너희 덕분에 좋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
도진이 지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좀 더 과감한 스킨십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공주님?”
지은은 그의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도진의 어깨에 기대었다. “도진 씨, 여기서 이러면 부끄럽잖아.”
준혁은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 눈에 띄게 불편해했다. 질투심과 후회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날 이후, 지은과 도진은 공개적으로 ‘가짜 연애’를 시작했다. 준혁과 유진이 나타나는 모든 모임과 행사장에 함께 참석했다. 지은은 도진과 함께 있을 때면 정말로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의 가짜 연애는 곧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고, 준혁과 유진에게는 상당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도진과의 관계도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그의 유머러스함과 세심함은 지은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도진은 지은이 힘들어할 때마다 곁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그는 단순히 ‘복수극의 조연’이 아니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요, 지은 씨. 복수도 중요하지만, 당신 감정이 더 중요합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힘들어하는 지은을 집으로 데려다주며 도진이 말했다.
지은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내가 이렇게 약한 줄 몰랐어. 그들이 너무 미워. 하지만 동시에 너무 슬퍼.”
“미워해도 괜찮아요. 슬퍼해도 괜찮고. 하지만 당신은 그들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자격이 있어요.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의 말은 지은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도진에게서 단순히 복수의 도구가 아닌, 진정한 위로와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게 가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예감에 휩싸였다.
***
시간이 흘러 준혁의 회사 창립 기념 파티가 열렸다. 준혁은 이 파티에서 중요한 투자 계약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물론 지은과 도진도 초대받았다.
“오늘이 하이라이트군요.” 도진이 지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은은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고, 도진은 그녀의 드레스와 어울리는 턱시도를 차려입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파티장 문이 열리고, 지은과 도진이 등장하자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준혁과 유진은 VIP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지은은 도진과 함께 사람들 사이를 우아하게 지나 준혁과 유진의 테이블로 향했다.
“준혁 씨, 유진아, 축하해. 창립 기념일이라니, 감회가 새롭겠네.” 지은은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차가운 승리감이 서려 있었다.
유진이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지은아, 와줘서 고마워…”
“아뇨, 뭘요. 중요한 자리인데 와봐야죠. 그리고 준혁 씨, 곧 발표할 투자 건, 정말 축하드려요. 도진 씨 덕분에 미리 소식 들었어요.” 지은은 일부러 도진을 강조했다.
준혁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도진의 회사가 준혁 회사의 주요 경쟁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최근 도진의 회사가 굵직한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때, 준혁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도진이 지은의 손을 꽉 잡았다.
“지은 씨, 이제 당신의 복수가 끝날 시간입니다. 그리고 저의 진심을 보여줄 시간이죠.”
지은은 도진의 말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도진 씨…?”
도진은 준혁의 발표를 기다리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지은에게 몸을 돌려 무릎을 꿇었다.
“지은 씨.” 그의 목소리는 파티장의 모든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처음엔 복수를 위한 계약 관계였지만, 당신과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제게는 진짜였습니다. 당신의 강인함과 순수함에 반했고,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준혁은 단상 위에서 발표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와… 진짜 연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복수는 제가 마무리할게요. 당신은 그냥 저와 함께 행복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도진은 지은을 올려다보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지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이건 그녀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가짜였던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진짜 사랑으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도진 씨…”
“사랑합니다, 지은 씨.” 도진은 망설임 없이 고백했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도진 씨를… 사랑해요.”
그 순간, 파티장에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준혁의 투자 발표보다도 이 로맨틱한 공개 고백에 더 열광했다. 준혁은 단상 위에서 굳어진 채,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은이 얼마나 더 멋진 사람과 행복해졌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은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 키스는 단순한 복수극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자, 진정한 사랑의 맹세였다.
며칠 뒤, 준혁의 투자 계약은 백지화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쟁사였던 도진의 회사가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그 계약을 가로챘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하지만 지은은 더 이상 그런 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녀의 복수는 이미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복수의 끝에서 그녀는 진정한 행복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은 씨, 이젠 당신이 복수의 여왕이 아니라, 제 삶의 여왕입니다.” 도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은은 도진의 품에 안겨 미소 지었다. “이제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배신은 아팠지만, 그 아픔은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그녀를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었다. 비극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가장 로맨틱한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