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강민준은 낡은 창고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고동치는 심장을 억눌렀다. 낡은 손목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빗방울이 후드득, 고여 있던 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 불이 환하게 켜진 고급 아파트 펜트하우스 창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이도현의 세계였다.
“도현… 이도현.”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서늘한 분노가 가득했다. 지난 생, 그에게는 ‘가장 믿음직한 친구’이자 ‘형제’였던 존재. 그러나 그 이름 뒤에 숨겨진 것은 잔인한 배신과 파멸이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되돌아온 지 벌써 석 달. 그의 심장은 과거의 상흔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은 이제 복수심이라는 단단한 갑옷이 되어 그의 정신을 무장시키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미래는 밝았다. 모든 것을 도현과 함께 일궈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도현은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주주총회 날, 위조된 장부와 조작된 증거들이 민준을 순식간에 탐욕스러운 사기꾼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한 이가 바로 도현이었다. 민준은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 재산,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마저 그의 등 뒤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그는 도현의 얼굴에 떠오른 비릿한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의문은 죽음의 순간마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 도현의 배신이 아직 꽃피기 전인, 바로 그 시간으로.
민준은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속에는 어두운 배경에 몇 줄의 코드가 빠르게 스크롤 되고 있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그는 도현의 모든 디지털 흔적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SNS 활동, 은행 거래 내역, 심지어 사적인 메신저 대화까지.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그는 미래의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나가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민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과거의 그가 지었던 해맑은 미소가 아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리한 미소였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유려하게 움직였다. 몇 번의 터치로, 익명의 계정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발송되었다.
[대상: 이도현]
[제목: 오랜만이다, 도현아.]
[내용: 혹시, 강민준 기억하니? 네가 정말 보고 싶어 하던 녀석 말이야.]
메시지는 발신인이 추적 불가능하도록 수십 개의 프록시 서버를 거쳐 암호화되어 전송되었다. 민준은 펜트하우스의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한 후,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복수는 이제 막, 서막을 올렸을 뿐이었다.
***
다음 날 정오, 민준은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강남의 한 프라이빗 룸 레스토랑. 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과거의 그라면, 이런 비싼 곳은 감히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 물론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돈’에 대한 집착은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돈은 그저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예약된 룸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바깥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중 누구 하나, 이곳에 앉아 있는 남자가 과거의 모든 것을 잃고 죽었던 존재였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민준은 준비한 태블릿을 꺼내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거기에는 어제 보낸 메시지에 대한 도현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담겨 있었다.
도현은 어젯밤 메시지를 받은 직후, 꽤 당황한 듯 보였다. 심야에 이른 시간까지 그의 메신저 활동이 활발했고, 몇몇 사람들과의 통화 기록도 포착됐다. 분명 ‘강민준’의 이름이 그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물론, 민준은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과거의 자신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조작해 두었다.
“궁금할 거야, 도현아. 내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문이 열리고, 이도현이 들어섰다. 그는 여전히 완벽한 모습이었다. 잘 재단된 수트,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사람 좋은 미소. 민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상사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오랜만이네, 민준아. 정말 오랜만이다.”
도현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과거라면 민준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반가움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떨림은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네, 대표님. 잘 지내셨습니까?”
민준은 ‘대표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과거의 민준이 도현을 ‘대표님’이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로서 이름을 불렀을 뿐. 도현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대표님이라니, 뜬금없이. 옛날처럼 편하게 불러.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어느 정도는 선을 그어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서로가 잘 알 테니까요.” 민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뼈가 있었다.
도현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난 늘 자네를 아끼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연락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면 어떡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 위선적인 말에 민준은 속으로 비웃었다. ‘걱정? 네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걱정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다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뭐…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민준은 도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겨우 기어 올라왔다고 해야 할까요. 저를 끌어내린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도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민준은 놓치지 않았다.
“무, 무슨 소리야. 복수라니… 자네가 무슨 원한 살 일을 했다고.”
“제가 한 게 아니죠. 당한 거죠.” 민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가장 믿었던 이에게 칼을 맞고, 모든 것을 빼앗겼으니.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도현은 목구멍을 한번 축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자네답지 않은 말인데.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나 보군. 괜찮아. 이제부터는 내가 도울게. 자네의 뛰어난 재능을 그렇게 썩히고 있을 순 없지.”
이것 봐라. 여전히 그가 가진 ‘재능’을 이용하려 드는군. 민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움이라… 글쎄요. 과연 제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특히,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와 연관된 사람의 도움을요.”
민준은 일부러 애매하게 말했다. 도현은 자신이 직접 민준을 배신했으니, 당연히 그 ‘연관된 사람’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가 자네를… 그럴 리 없잖아! 우리는 형제 같았는데!” 도현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친구라는 가면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형제요? 하하.” 민준은 낮게 웃었다.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과거의 저는 너무 순진했고, 사람을 믿었죠. 특히,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요.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도현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도현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손으로 찻잔을 잡았지만, 잔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게 뭔데? 설마 나를 찾아온 이유가…”
“원하는 거요?” 민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가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저는, 제 것을 되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심장을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가웠다. 도현은 완전히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갈 터였다. 민준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자리에 나타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태블릿을 집어 드는 그의 손길은 흔들림이 없었다.
“생각해봤습니다. 대표님. 저를 배신한 그들이, 제가 돌아온 걸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제가 그들을 어떻게 파멸시킬지.”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룸을 나섰다. 텅 빈 룸에 홀로 남겨진 이도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혼란과 공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민준은 정확히 그 감정을 노렸다. 혼란에 빠진 도현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그 실수가 바로 민준의 복수의 시작점이 될 터였다.
“이제 시작이야, 이도현.”
민준은 레스토랑을 벗어나며,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심장은 고요했지만, 내면에는 지옥불 같은 복수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과거의 빚은 반드시 갚아야 했다. 피는 피로, 고통은 고통으로. 그것이 그가 시간을 되돌려 받은 유일한 이유였다. 이제 그의 손에 쥔 것은 과거의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 그리고 타오르는 복수심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