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녘의 고요가 짙게 깔린 방 안, 차가운 금속성 광택을 내는 수면 포드가 희미하게 빛났다. 강민혁은 익숙한 동작으로 포드에 몸을 뉘었다. 부드러운 쿠션이 전신을 감싸고, 이마에 닿는 차가운 센서가 그의 뇌파를 읽기 시작했다. 짧은 기계음과 함께, 현실의 모든 감각이 아득히 멀어졌다.
“……접속 중. ‘강호지전: 운명의 격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나직한 기계음이 사라지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비좁은 자취방의 천장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기암괴석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고, 그 사이로 은빛 폭포수가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리는 절경이었다. 콧속으로는 풀내음과 흙내음이 섞인 상쾌한 공기가 가득 들어찼고, 발밑으로는 거친 돌멩이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아… 역시 이곳이 내 세상이지.”
민혁은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캐릭터 ‘무영(無影)’은 낡아빠진 검은색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녹슨 장검을 차고 있었다. 누구라도 길가의 흔한 거지나 떠돌이 행상인으로 착각할 만한 초라한 행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함 속에,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빛이 숨어 있었다.
지금 그는 촉산(蜀山) 깊은 산골의 한 동굴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그가 숨겨진 비급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곳이었지만, 한 달째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잡몹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젠장, 오늘도 꽝인가. 이놈의 비급은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투덜거리며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크아아앙!*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와 함께, 온 세상이 번개 맞은 듯 환하게 번쩍였다. 민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고, 그 빛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직접 붓글씨를 쓰듯, 웅장하고 신비로운 글자들이 허공에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시스템 공지: 천하(天下)의 모든 강호인에게 고한다!]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대사건이 도래했으니, 감히 천하의 패권을 꿈꾸는 자, 그대들의 무예를 증명하라!]
[단 한 번, 백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무림의 대축제, ‘천하제일 무림대회’가 개최될 것이다!]
민혁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천하제일 무림대회! 그 이름은 무협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무림인의 로망이자 최종 목표와도 같은 대회였다. ‘강호지전’이 오픈하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최되지 않아 많은 이들이 전설처럼 여기던 그 대회였다.
[본 대회는 각 문파의 수장, 은거 기인, 무림의 신성 등 모든 무림 고수들이 참여하는 진정한 천하제일인을 가리는 자리이며…]
[최종 우승자에게는 ‘천하패권(天下覇權)’의 자격과 함께, 무림의 전설 ‘구절 비전(九絶秘典)’의 계승권이 부여될 것이다!]
[구절 비전의 계승자는 혼란에 빠진 강호를 평정하고, 새로운 무림의 시대를 열어갈 자로 추대될 것이니…]
민혁의 초연했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구절 비전이라니. 그것은 단순한 무공 비급이 아니었다. ‘강호지전’의 설정상, 구절 비전은 과거 모든 무림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던 ‘천하무제(天下武帝)’가 남긴 최강의 유산이자, 혼돈에 빠진 강호를 구원할 열쇠라고 알려져 있었다.
“정말이군… 드디어 열리는 건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녹슨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작은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 읽었던 무협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 또한 언젠가 천하제일인이 되어 강호를 평정하고 싶다는, 어쩌면 유치하고 맹랑한 꿈을 꾸곤 했었다. 현실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나약하기까지 했던 그였지만, 이 가상현실 속에서는 달랐다. 무영으로서의 그는, 언제나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자신만의 무공을 갈고닦았다.
[대회 참가 자격: 레벨 100 이상, 혹은 각 문파의 정식 제자.]
[대회 예선은 오늘부터 1개월 후, 강호 각지의 100개 주요 도시에서 동시 진행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 및 각 도시의 무관(武館) 게시판을 참조하십시오.]
공지 메시지가 사라지고, 다시 푸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처럼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 세계의 ‘강호지전’ 플레이어들이 이 공지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이 갔다. 아마 지금쯤 각 서버 게시판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수많은 고수들이 은거지를 박차고 나올 것이고, 이름 없는 신성들이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 것이다.
민혁은 자신의 캐릭터 정보창을 열었다.
[이름: 무영(無影)]
[레벨: 102]
[내공: 5000/5000]
[무공: 무영보(無影步) – 소성(小成), 무명검법(無名劍法) – 대성(大成), 심득(心德) – 10%]
[특수 능력: 둔갑술(遁甲術) – 미습득]
레벨은 간신히 참가 자격에 턱걸이했다. 무명검법은 그가 오랫동안 수련해 온 고유 무공이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검법이었지만, 그가 게임 내에서 직접 겪은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형하고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무명’, 이름 없는 검법이었다.
“천하제일 무림대회….”
민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넓은 강호에 과연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숨어 있을까. 문파의 절기(絶技)를 익힌 정파의 고수들, 사악한 술수를 쓰는 사파의 마인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전(秘傳)을 익힌 은거 고수들. 그들과 겨루어 천하제일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민혁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에 들린 녹슨 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잠시 번뜩였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라면… 피할 필요는 없지.”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천하의 운명을 건 거대한 무대에, 이름 없는 그림자, 무영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동굴 속 비급 같은 시시한 사냥은 더 이상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천하제일 무림대회의 정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