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잔상의 끝, 그리고 시작
새벽의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하늘은, 유리창 너머로 엷은 장밋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작고 아담한 이 작업실은 늘 그랬듯, 고소한 커피 향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로 가득했다. 나의 손끝에서 섬세하게 그려지던 캐릭터는,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는 듯 화면 속에서 반짝였다. 그녀의 이름은 ‘별이’.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애니메이션, 「별의 잔상」의 주인공이었다.
“하윤아, 이 부분 표정 좀 더 힘내볼까? 별이가 드디어 우주선을 만들어서 떠나는 장면이잖아.”
따뜻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옆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지수였다. 길고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가 웃었다. 지수의 웃음은 언제나 햇살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떤 역경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 지수 님의 깐깐한 디렉팅은 못 당하죠.”
나는 살짝 농담조로 응수했지만, 사실 지수의 의견은 늘 정확했다. 내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주는 마법 같은 친구였다. 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꿈을 함께 꾸었고, 졸업 후에는 이렇게 작은 작업실을 얻어 ‘별의 잔상’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내 그림과 지수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셀 수 없는 밤들이 이 프로젝트의 바탕이었다.
“깐깐하긴. 다 너 잘 되라고 그러지. 이번 캐릭터 디자인, 정말 역대급이라니까. 누가 강하윤 아니랄까 봐.”
지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내 마음은 다시 한번 뭉클해졌다. 서로에게 건네는 무한한 신뢰와 지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별의 잔상」은 우주를 유영하며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헤매는 작은 소녀 별이의 이야기였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작지만 단단한 마음을 가진 별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그린 별이의 표정 하나하나에는 그런 우리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네. 이 에피소드만 완성하면 드디어 투자 유치도 순조롭게 될 거야. 내년에 우리 작업실, 더 멋진 곳으로 옮길 수 있겠다, 그치?”
지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성공의 환한 빛이 비추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함께 꿈을 이뤄가는 순간이 이토록 달콤할 수 있을까. 새벽의 푸른빛은 어느새 황금빛으로 변해 창밖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따금 작업실에 들르는 친구들이 ‘너희 둘, 둘이 합쳐 천재 아니냐’며 엄지를 치켜세울 때마다 지수는 늘 이렇게 말했다. “하윤이가 다 한 거죠. 저는 옆에서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에요.”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지만, 지수의 칭찬은 나를 더욱 힘내게 하는 주문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내 최고의 지지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며칠 뒤, 마지막 에피소드의 시안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밤샘 작업 끝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해냈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지수는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하윤아, 정말 고생 많았어. 네 덕분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들렸다. 우리는 곧 있을 투자자 미팅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우리에게는 이제 성공만이 남아있다고 믿었다.
***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이 푸른 하늘을 수놓았고, 따사로운 햇볕이 온 세상을 감싸 안는 듯했다.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우리가 만들어낸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로웠다.
나는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며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서지수, 신생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에테르’ 설립 및 신작 ‘별의 잔상’ 발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손이 덜덜 떨렸다.
뭐지? ‘에테르’? ‘별의 잔상’ 발표?
나는 클릭했다. 화려한 보도 자료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지수 대표, 독창적 세계관과 감각적 캐릭터 디자인으로 업계 이목 집중!”
첨부된 이미지에는 분명 내가 밤낮없이 매달려 그린 ‘별이’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심지어 지수가 직접 찍어 보냈던 우리 작업실 풍경과 흡사한 배경까지. 그러나 그 어떤 곳에도 ‘강하윤’이라는 내 이름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문장만이 뇌리에 박혀 울렸다.
*독창적 세계관과 감각적 캐릭터 디자인… 서지수 대표…*
나는 손을 뻗어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가락이 떨려 번호를 누르기가 힘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계적인 목소리.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몇 번을 더 걸었다. 계속해서 같은 목소리만 반복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 휴대폰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발신인은 지수.
나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하윤아. 미안해. 사실… 너랑 나,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어. 네 그림은 너무 좋지만, 솔직히 너한테는 사업 수완이 없어. 이대로 가면 우리 둘 다 망할 게 뻔했어. 그래서 내가 먼저 움직였어. ‘별의 잔상’은 내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했어. 어차피 캐릭터 디자인은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아. 내가 스토리 라인 다 짰고, 연출 방향 잡았잖아. 이제부터 나는 ‘에테르’ 대표 서지수야. 넌… 다른 길 찾아봐.]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었다. 차갑고 잔인한 몇 문장이, 지난 세월의 모든 따뜻했던 기억을 한순간에 재로 만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놓쳤다. 쨍그랑, 바닥에 부딪히며 액정이 산산조각이 났다.
내 마음도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었다. 햇살 같던 미소를 짓던 지수가, 내 손을 잡고 함께 꿈을 이야기하던 지수가, 어깨를 다독이며 ‘네 덕분이야’라고 말해주던 지수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우리가 함께 만든 ‘별의 잔상’을 이렇게 유린할 수 있을까.
작업실을 휘감던 커피 향은 어느새 역겨운 냄새가 되어 내 후각을 자극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피아노 선율은 비웃음처럼 들렸다. 내가 밤낮없이 매달렸던 모니터 속 별이의 얼굴이, 이제는 나를 비웃는 듯했다.
나는 주저앉았다.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올 것처럼 소리쳤지만,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이 작은 작업실은 이제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지옥이 되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을 깨물어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공허함만이 나를 감쌌다. 내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울고 또 울다 지쳐 정신을 차렸을 때,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고요한 작업실, 깨진 휴대폰, 그리고 내 앞에 놓인 모니터 속 별이의 잔상이 처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잔상 속에서, 별이는 여전히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별이를 보며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오직 배신감과 분노만이 가슴을 찢었다.
문득, 모니터 속 별이의 눈빛이 마치 나를 보듯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작은 몸뚱이로 우주를 떠다니는 별이. 그 아이의 눈동자에서, 나는 나의 절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나는 섬광처럼 번뜩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복수.
나를 짓밟은 지수에게, 우리의 꿈을 더럽힌 그녀에게, 나의 모든 것을 되찾아올 방법을 찾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그녀가 짓밟은 건 꿈만이 아니었다. 내 영혼, 내 삶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차가운 분노가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얼음 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래, 지수. 너는 내가 만든 별이로 날아올랐지만, 결국 그 별은 네게 독이 되어 돌아올 거야.
네가 훔쳐간 모든 것을, 네가 지었다고 주장하는 모든 영광을, 하나도 남김없이 빼앗아 버릴 테니까.
이것은 더 이상 「별의 잔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강하윤의 처절한 복수극의 시작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박살 난 액정 사이로 보이는 내 얼굴은, 더 이상 순진하고 무구한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표정을 한, 완전히 새로운 나였다.
별이의 잔상은 이제 나의 복수를 위한 길을 비추는 등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나는 서지수, 네가 무릎 꿇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반드시.
창밖의 어둠 속에서, 차가운 달빛이 작업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