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하늘은 핏빛으로 물든 채 묵묵히 저물고 있었다. 지훈은 망가진 오토바이 잔해를 발로 툭툭 차며 허물어진 고가도로 아래를 걸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흔적은 이제 녹슨 철골과 깨진 콘크리트 조각, 그리고 이름 모를 진흙 같은 것들로 뒤덮인 흉물스러운 폐허가 전부였다. 며칠째 제대로 된 먹을 것을 입에 대지 못했지만, 뱃속에서 울리는 허기보다 더욱 깊은 것은 세상이 변해버린 이후부터 지훈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지독한 고독감과 불안감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낯설게 들리는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너무나도 크게 울렸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듯한 침묵은 때때로 비현실적인 소음으로 대체되곤 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 심장이 쿵쾅거리는 저음의 울림, 혹은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합창 소리 같은 것들. 그것들은 지훈의 신경을 시시때때로 긁어댔고, 그의 이성은 종잇장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한때 이 도시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가족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작지만 소중한 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사라졌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뒤틀리고, 밤하늘에 기괴한 색깔의 별들이 떠오르던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남은 것은 오직 생존 본능뿐이었다.
무너진 마트 건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부패한 시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바닥에는 정체 모를 점액질이 미끄럽게 엉겨 붙어 있었고, 군데군데 핏자국이 말라붙어 검붉게 변해 있었다. 지훈은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비췄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섬뜩한 광경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선반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이라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훼손된 포장재나 썩어버린 내용물뿐이었다. 그 와중에,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죽어 있는 사람의 형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피부는 비늘처럼 변색되어 있었고, 손가락은 기이하게 늘어나 바닥을 긁고 있었다. 눈은 텅 빈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공포와 광기, 그리고 알 수 없는 숭배의 흔적 같은 것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변한 이후,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변했다. 하나는 지훈처럼 끝까지 이성을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자들, 다른 하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기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숭배하며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훈 역시 매 순간 광기의 유혹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그는 서둘러 그 시체 아닌 것을 뒤로 하고 다른 통로로 향했다. 그러다 우연히 찬장이 뒤집힌 구석에서 캔 하나를 발견했다. 녹이 슬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내용물은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의 메마른 심장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이게 얼마 만이냐…”
캔을 주워들자, 그 아래에서 반짝이는 금속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전등 불빛을 받아 미약하게 빛나는 그것은, 작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목걸이 펜던트였다. 한때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펜던트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렁이는 촉수 같은 형상들, 비틀린 별 모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닫힌 눈동자 같은 문양. 본 적 없는 문양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지훈의 정신을 잡아끄는 불쾌한 매력이 있었다.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어떤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 바다가 넘실거리고, 그 위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 아래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팔을 뻗어 환호하는 모습… 끔찍한 환각이었다. 그는 황급히 펜던트를 내려놓았다. 손에서 전해져 오는 싸늘함이 단순한 금속의 차가움이 아니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캔을 챙겨 마트를 나섰다. 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밤하늘은 익숙한 검푸른 색이 아닌, 보랏빛과 녹색이 뒤섞인 불길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틀린 별들은 더욱 선명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이질적인 별 하나가 심장처럼 천천히 맥동하는 듯 보였다.
숙소로 삼은 낡은 상가 건물로 돌아와 캔을 따자, 쿰쿰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래도 먹을 만한 상태였다. 그는 허겁지겁 캔에 든 내용물을 입에 넣었다. 몇 안 되는 귀한 식사를 마친 후, 지훈은 침낭에 몸을 뉘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기가 두려웠다. 잠이 들면 악몽이 찾아올 것이고, 그 악몽 속에서는 세상이 변하기 전의 평화로운 기억들이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 지훈의 영혼을 괴롭힐 터였다. 어쩌면 그 이상한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꿈속에서 더욱 선명해질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살려줘… 흐읍, 흐읍…”
희미하지만 분명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다른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건물 뒤편의 좁은 골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손전등을 켜고 골목 안으로 비추자, 놀랍게도 한 여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녀는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당신… 괜찮아요?”
지훈의 목소리에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토끼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저, 저들이… 저들이 쫓아와요…!”
“누가요? 대체 누가요?”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젓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훈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 황폐한 세상에서 다른 생존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여자의 뒤를 쫓아 뛰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불길하게 타오르는 모닥불과 함께 기이한 의식을 행하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검은 칠을 하고 뼈로 만든 장신구를 걸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광기로 번득였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저들이에요… 저들이 절… 잡으려고 해요!” 여자가 지훈의 뒤에 숨으며 속삭였다.
“젠장, 광신도들이군.”
지훈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신의 징표로 여기며 알 수 없는 존재를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이성을 잃고 광기에 빠져든 그들은 다른 생존자들을 희생물로 바치거나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 했다.
그들 중 하나가 지훈과 여자를 발견했는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곧이어 모든 광신도가 흉측한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지훈은 여자의 손을 잡고 무너진 건물 사이로 도망쳤다. 총이 있다면 좋겠지만, 총알은 귀했고, 그나마 남은 몇 발도 아껴야 했다. 그가 가진 것은 녹슨 칼과 망치, 그리고 순전히 생존을 위한 투지뿐이었다.
골목길을 가로지르고, 잔해 더미를 넘어 달리기를 몇 분. 지훈은 여자를 데리고 한 낡은 지하철역 입구로 뛰어들었다. 철제 문은 이미 녹슬어 제 역할을 못했지만, 내부로 통하는 계단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리로 숨어요!”
지훈은 여자를 지하 계단 아래로 밀어 넣고, 자신은 뒤따라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습하고 차가워졌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낡은 지하철 터널의 입구가 드러났다. 터널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일단 안전할 거예요.”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름이 뭐예요?” 지훈이 물었다.
“수연이에요. 이수연.”
“나는 지훈이에요.”
수연은 고개를 들어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공포가 가득했지만, 동시에 작은 희망의 불꽃이 일렁였다.
“혼자였는데… 정말 오랜만에 다른 사람을 만났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지훈은 수연 옆에 앉아 터널의 어둠을 응시했다. 광신도들이 이 터널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은 대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곳 지하철 터널은 그들에게도 불길한 장소일 수 있었다. 소문에는 지하 깊은 곳에 더욱 오래되고 거대한 ‘무엇’이 잠들어 있다고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일단 여기서 좀 쉬어요.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알 수 있었다. 내일 아침이 되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불길한 색으로 빛날 것이고, 세상은 여전히 뒤틀린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들어, 다음 끼니를 찾아 헤매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광기와 공포에 맞서 싸워야 할 터였다.
수연은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웅크렸다. 지훈은 손전등을 껐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멀리, 아주 멀리서, 땅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웅장하고 거대한 맥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세상의 심장이 뛰는 소리일까, 아니면 이 모든 광기의 근원이 깨어나는 소리일까. 지훈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그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언젠가 존재했을지도 모를 인류의 희미한 기억을 위해. 광기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지훈은 주머니 속 녹슨 캔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이 그들의 다음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