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이었다. 스물여덟 살 고독한 서울 자취생, 지훈에게 야근과 배달음식, 그리고 넷플릭스는 삶의 세 가지 기둥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 눅진한 공기 속에 인스턴트 미역국라면 냄새가 희미하게 퍼졌다. 젓가락으로 면발을 후루룩 넘기던 그의 귀에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젓가락을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새벽 한 시. 이 시간에 누가 문을 두드릴 리 만무했다. 혹시 윗집? 아니, 윗집에서 들리는 소리는 항상 ‘쿵, 쿵’ 하는 둔탁한 발소리뿐이었다. 창문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멀리서 점멸할 뿐, 빌딩 숲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착각인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식탁 위, 방금 전까지 멀쩡히 서 있던 유리컵이 ‘짤그랑’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컵을 비튼 것처럼.
지훈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 야?”
그는 컵에 손을 뻗으려다 흠칫 멈췄다. 컵은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투명한 유리 표면에 희미한 무지개빛 잔상이 잠깐 어른거린 듯했다.
“피곤한가 보네.” 그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시간에 유체이탈도 아니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불안한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이상한 일들이 일상처럼 찾아왔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히고, 욕실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밤에는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전기의 문제, 배관의 문제, 층간소음, 별별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분명 이 아파트, 아니, 이 방에 무언가 있었다.
지훈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절대 혼자 있지 않으려 애썼다. 친구들을 부르고, 일부러 늦게까지 회사에 남았다. 하지만 고요한 밤,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그를 덮쳐왔다.
어느 날 늦은 밤, 그는 결국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며칠 밤잠을 설치느라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귓속에서 자신의 심장 박동이 천둥처럼 울렸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오래된 양장본 소설책이 ‘펄럭!’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잊힌 자들의 서사시』. 표지만 봐도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을 법한, 학부 시절 교양 수업 때나 읽었던 두꺼운 판타지 소설이었다. 책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책장을 펴 들고 읽는 것처럼 허공에서 펼쳐졌다. 낡은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이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벽에 부딪혔다. 낡은 가죽 표지는 찢어지고, 종이 조각들이 흩날렸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울렸다. “뭐… 뭐냐 너!”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밖은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 웅얼거림.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파도 소리 같기도, 거대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한 불분명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치 고대 유물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처럼, 알 수 없는 형체가 어른거렸다.
책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런데 그 조각들 사이로, 불가능할 정도로 선명한 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찢어진 종이 틈새로 다른 차원의 풍경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잠시,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지훈은 보았다. 거대한 고대의 성벽, 그 위를 휩쓰는 푸른색 섬광, 그리고 하늘을 가르며 날아다니는 거대한 그림자들. 압도적인 힘과 장엄함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부신 빛과 함께 ‘콰아앙!’ 하는 굉음이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 주방의 그릇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혼란스럽게 이어졌다.
지훈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겨우 몸을 일으켜 부서진 책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빛은 사라졌고, 다시 평범한, 파괴된 책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종이의 가장자리, 낡은 가죽 표지의 틈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에메랄드색 문양이 보였다. 그것은 이전에 본 적 없는 기이한 글자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울려 퍼졌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기억처럼.
*엘레지아.*
*봉인.*
*균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압력과 함께 그의 의식을 강타한 한 문장.
‘문을 열었으니, 대가를 치를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