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그림자 덮인 숲, 고대의 심장이 뛰다
습기 가득한 숲은 태초의 숨결을 간직한 듯했다. 짙푸른 이끼가 바위 틈을 기어 오르고, 이름 모를 덩굴 식물들은 거대한 나무들을 휘감아 하늘을 가렸다. 간간이 새소리가 들려올 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특유의 정적만이 숲을 지배했다. 찌뿌둥한 어깨를 연신 주무르던 한유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앞에 선 남자를 톡톡 건드렸다.
“김도진 씨, 혹시 우리가 길을 잃은 건 아닐까요? 벌써 일곱 시간째 숲만 헤매고 있는데.”
김도진, 이 시대 최고의 ‘고대 유적 덕후’이자 자칭 천재 고고학자(아직 학위는 없지만)는 귀에 헤드셋을 꽂고 손에 든 낡은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맹수 사냥에 나선 포식자의 그것처럼 이글거렸다. 유리의 질문에도 건성으로 “아, 유리 씨. 잠깐만요, 거의 다 왔어요!” 하고 외칠 뿐,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유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등에는 배낭과 함께 삽, 곡괭이, 심지어 밧줄까지 알차게 들어 있었고, 도진의 짐은 고작 카메라와 돋보기, 그리고 잔뜩 구겨진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유적 발굴에 필요한 장비를 챙긴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모든 짐을 자신이 메고 온 꼴이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을 지난 세 시간 동안 한 스물 번은 들은 것 같은데요. 대체 우리가 찾고 있는 게 뭔데요? 지상에서 사라진 미지의 문명? 아니면 전설 속 요정 마을이라도?”
유리의 비아냥거림에도 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숲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입니다! 분명 저곳이에요!”
유리가 도진이 가리킨 곳을 봤지만, 그저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바위 절벽이 보일 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에 유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뭔데요? 그냥 바위 절벽이잖아요. 또 뭔가에 홀리신 건 아니고요?”
도진은 흥분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로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홀리다뇨! 여기, 이 고문헌에 따르면 말이죠, ‘오랜 숲의 가장 깊은 곳, 태고의 눈물이 흐르는 곳에 잠든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저 절벽, 자세히 보면 폭포가 있잖아요! 지난밤 위성 사진으로도 잘 안 잡히던 곳인데, 역시 직접 와봐야…”
그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야, 김도진 씨! 혼자 가요? 너무 빠르잖아요! 저기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진을 따라잡았을 때, 유리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바위 절벽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는 신비로운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고, 그 물줄기 뒤편으로 희미하게 무언가 거대한 것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상에…”
유리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폭포 뒤편에 숨겨진 것은 거대한 석문이었다. 이끼와 덩굴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육중한 존재감은 쉬이 감춰지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진 검은 돌문이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어! ‘태고의 속삭임’ 유적이야!”
도진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석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리는 그의 등짝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오타쿠 같은 남자가 이럴 때는 늑대처럼 날쌔다니까.
“잠깐만요, 김도진 씨! 무턱대고 들어가지 마요! 함정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지만 도진은 유리의 경고를 들을 리 만무했다. 그는 이미 석문에 바싹 붙어 손으로 표면을 쓸어보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고대의 먼지가 풀썩이며 떨어져 나갔다.
“이 문양… 이건 초기 고대 엘리온 문명의 특징이야! 봐요, 유리 씨! 저 섬세하면서도 기괴한 곡선들은 다른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술성이라고요!”
도진은 흥분해서 유리 쪽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그 순간, 그의 발이 축축한 바닥의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렸다.
“으악!”
도진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은 그대로 석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머리는 간발의 차이로 문에 박힌 어떤 돌출부에 부딪힐 뻔했다.
“김도진 씨!”
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도진의 허리를 잡아챘다. 쿵! 그녀의 몸이 도진의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함께 쓰러졌다. 도진은 유리의 팔에 붙잡힌 채 겨우 중심을 잡았고, 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진의 머리 위를 노려봤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의 머리가 그 돌출부에 세게 부딪혔을 것이다.
“정신 차려요, 진짜! 여기가 놀이터인 줄 알아요? 조금만 더 가면 머리가 깨졌을 거라고요!”
유리의 등은 딱딱한 돌바닥에 부딪혔는지 살짝 얼얼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도진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겪을 뻔한 아찔한 순간을 깨달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어어… 유리 씨! 괜찮아요? 제가, 제가 또 흥분해서…”
그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리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그의 가슴에 거의 닿아 있었다. 그들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숲의 정적 속에서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유리는 잠시 숨을 멈췄다. 도진에게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야생의 향이 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풍겨오는 미묘한 열기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크흠.”
유리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도진을 밀어냈다. “됐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주변부터 살펴요. 저 돌출부도 뭔가 의미가 있을지 모르고…”
그녀의 시선은 도진의 머리가 부딪힐 뻔했던 석문의 돌출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돌기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정교하게 조각된, 마치 심장처럼 보이는 문양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 문양의 중앙에는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도진은 유리가 가리킨 곳을 봤다. 그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저건… ‘생명의 심장’ 문양! 이 문명에서는 가장 신성한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어, 그런데 이 홈은 뭐지? 뭘 끼우는 곳 같은데…”
도진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 홈의 깊이를 가늠했다. 그 순간, 유적의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깨어나듯, 낮고 묵직한 울림이 온몸을 진동시켰다. 폭포 소리도 잠시 잦아드는 듯했다.
“이 소리는…!” 도진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혹시 문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문의 심장 문양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홈을 중심으로 석문 전체에 뻗어나가는 문양들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콰앙- 쾅!
묵직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수천 년간 닫혀 있던 고대의 문이 마침내 인간의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눅진한 공기와 함께,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킬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는 도진의 팔을 꽉 잡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어둠 속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있었다.
“자, 잠깐만요, 김도진 씨!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도진은 유리를 돌아봤다. 그의 눈은 다시 그 특유의 광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모르게 설렘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걱정 마요, 유리 씨. 내가 지켜줄게요.”
유리는 기가 막혔다. 이 남자가 대체 누굴 지켜준다는 건지. 방금 전 목숨 건진 건 자신인데! 하지만 도진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그녀도 모르게 이상한 신뢰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저 앞의 어둠이 그들을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모험이 결코 지루할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심장도 도진의 심장처럼 알 수 없는 고대의 박동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