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 미로의 심장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빽빽한 빌딩 숲, 그 안에서도 유독 평범해 보이는 15층짜리 아파트, 그 아파트의 가장 평범한 층에 위치한 그의 집이었다. 출퇴근길 지옥철, 상사의 잔소리, 치솟는 물가, 이 모든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신만의 성에 들어선 기분. 그게 그가 아파트 현관문을 열 때마다 느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현관에 가방을 툭 던져 놓고, 늘 그렇듯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배달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밀린 웹툰을 보며 킬킬거렸다. 시간은 훌쩍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져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려던 찰나였다.

“…응?”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이 사라졌다. 소파 틈새도 뒤져보고, 혹시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민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나 직접 TV 전원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아침. 시리얼을 먹으려 컵에 우유를 따르는데, 식탁 위 컵받침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툭, 하고 제자리를 벗어나는 순간은 분명 보았는데, 너무나 짧은 찰나여서 착시현상인가 싶었다. 설마. 이런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너무 유난 떠는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사소한 움직임들은 밤이 될수록 대담해졌다. 퇴근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욕실 문이 닫혀 있었다. 분명 열어두고 나왔는데. 쿵, 하고 거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 가보니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제목은 <미궁 속으로>. 민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들어올 틈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밤이 깊어갈수록 아파트는 낯선 존재로 변모했다. 거실의 스탠드 불빛이 춤추듯 깜빡이다가 이내 전기가 나간 것처럼 완전히 꺼지곤 했다.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려는데 냉수가 아닌 얼음장 같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손이 얼어붙는 듯했다. 안방에서는 누군가 벽을 긁는 듯한 ‘사사삭’ 소리가, 주방에서는 냄비 뚜껑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소리들은 귓가를 파고들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대신 발밑에서 ‘쿵’ 하고 건물이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침대 프레임이 흔들리고, 천장의 조명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민준은 더 이상 이걸 단순한 환각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 아파트는, 그의 집은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미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집 안 구석구석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증거를 남겨야 했다. 아니, 어쩌면 이 현상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미지의 존재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젠장…!”

그는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컵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던 그곳. 섬뜩한 냉기가 감도는 그곳.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가 갑자기 기이하게 늘어지며 꺼졌다. 정적 속에서 민준의 발걸음 소리만이 뚜벅, 뚜벅, 하고 울렸다. 어둠 속에서 주방 가구들의 윤곽이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식탁 위에는 며칠 전 그가 먹었던 시리얼 그릇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릇 안에 남은 시리얼 우유가 마치 누군가 휘저은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순간,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날이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에 박혔다.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치 던전 깊숙한 곳에서 강력한 괴물과 마주한 모험가의 기분이었다. 칼날은 분명 자신을 향해 떨어진 것이 아니었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경고’.

“당신은…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목소리는 쥐어짜듯 나왔다. 대답 대신, 싱크대 수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콸콸콸.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않았는데, 물줄기는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천장으로 솟구쳤다. 이내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물줄기가 솟구치며 만들어낸 물안개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림자는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매. 팔을 뻗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벽에 걸려있던 프라이팬이 ‘쨍그랑’ 하고 떨어져 민준의 머리 위를 스쳤다.

“으악!”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주방을 뛰쳐나왔다. 거실을 지나 현관을 향해 달렸다. 탈출해야만 했다. 이 미궁 같은 아파트에서 벗어나야 했다. 손잡이를 붙잡으려는데,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잠금장치가 저절로 ‘철컥’ 소리를 내며 잠겼다.

“열려! 열라고!”

민준은 손잡이를 잡고 흔들고, 문을 발로 찼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실에서부터 차가운 냉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거실 바닥에 깔려 있던 러그가 스스로 접히기 시작하더니, 마치 뱀처럼 민준의 발목을 휘감았다.

“크헉!”

넘어진 민준의 눈에, 천장의 조명이 또다시 깜빡이는 것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치 언어처럼, 불규칙하게, 하지만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듯했다. ‘나…갈…수…없…다…’

이건 탈출해야 할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가장 깊은 곳에 갇힌 채,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보스’에게 포위된 것과 같았다.

“아니… 아니야… 여긴 내 집이야…!”

그의 목소리는 절규로 변했다. 하지만 대답은 냉혹한 정적과, 문틈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천장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웃음소리뿐이었다. 민준은 러그에 발목이 묶인 채, 점점 더 차가워지는 아파트 한복판에서, 자신이 갇힌 미궁의 심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는 이 던전의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 혹은, 자신을 가둔 존재의 의지를 따라야만 했다. 그 선택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