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2화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창호지를 스며들어 뺨을 간질였다. 눈을 뜬 리나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제의 혼란과 좌절이 여전히 마음속을 맴돌았지만, 밤사이 희미하게나마 찾아온 고요는 익숙지 않은 안정감을 주었다. 이곳은 낡았지만 아늑하고,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창밖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곳에 온 지 이틀. 도운 할아버지의 온기 어린 보살핌 덕분에 낯선 세상에서 완전히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여전히 그녀를 옥죄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왜 이곳에 있는가?

몸을 일으킨 리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검은색 손목시계 모양의 장치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유일한 단서. 차가운 금속성 재질은 손에 닿는 순간부터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표면에는 미세한 선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푸른색 돌이 박혀 있었다. 돌은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우주라도 담긴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고요했다. 부엌에서는 벌써 구수한 숭늉 냄새가 풍겨왔다. 리나가 방문을 열자, 할아버지는 작은 상에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나물 몇 가지와 된장국, 그리고 따뜻한 밥. 소박하지만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낯선 기억의 조각

“잘 잤느냐, 아가씨. 어서 와서 밥 먹으렴.”

할아버지의 푸근한 목소리는 리나의 경직된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였다. 함께 밥을 먹는 동안, 할아버지는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리나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켜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있을 때였다. 리나는 다시 손목의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이 장치가 그녀에게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장치의 푸른 돌에 손가락을 대자, 희미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무심코 돌을 눌러보았다.

그 순간, 푸른 돌이 깜빡하고 빛을 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리나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할아버지도 놀란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것이… 반응을 보이는구나?”

리나는 다시 돌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우연이었을까? 실망감에 한숨을 쉬려던 찰나, 그녀의 머릿속을 강렬한 섬광이 꿰뚫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앞에 난해한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으로 뒤덮인 거대한 도시,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홀로그램 광고판. 귀를 찢는 듯한 기계음과 알 수 없는 언어의 속삭임. 그리고…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불안과 공포. 누군가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리나… 시간이 없어!’

“크윽!”

리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했다. 온몸의 세포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마루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할아버지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냐? 대체 무슨 일이냐!”

어지러움과 구토감이 밀려왔다. 희미하게 보였던 환영들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그 잔상은 리나의 심장을 거세게 울렸다.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불안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박함이 뒤섞인 감정들이 그녀를 휘감았다.

“도시… 차가운… 거대한… 누군가… 저를…”

리나는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다독였다. “쉬이, 쉬이… 괜찮다,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기억의 파편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모호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꿈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그녀를 흔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기억 속에는 강렬한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무언가를 지켜내야 하는 듯한, 혹은 도망쳐야 하는 듯한 긴박함.

시간의 메시지

정신을 차린 리나는 자신이 왜 그런 환영을 보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장치 때문이었다. 푸른 돌을 눌렀을 때, 희미하게 빛이 났고, 곧이어 기억의 파편이 덮쳐왔다. 그렇다면 이 장치가 그녀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거나, 혹은 기억을 되찾는 매개체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이 장치를 다시 한번 봐주실 수 있으세요?”

리나는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장치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쓰고 장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음… 이런 물건은 생전 처음 보는구나. 쇠붙이인데도 이렇게 매끄럽고, 이 푸른 돌은 보석 같기도 하고… 참 신기하네.”

할아버지는 돌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돌이 다시 한번 희미하게 깜빡였다. 리나는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이번에는 기억의 파편이 밀려오지 않았다. 대신, 장치의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선들이 푸른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빛은 선을 따라 흐르더니, 중앙의 푸른 돌 주위에 작은 글자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투명하고 푸른빛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공중에 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내리고 눈을 비볐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조화냐? 빛으로 된 글씨라니…”

리나는 얼른 글자들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아는 어떤 문자도 아니었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선들이 뒤섞인 듯한, 미래적인 문양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숫자들이 있었다.

“숫자… 365… 그리고 2054…?”

리나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그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2054년이 자신이 왔던 시간일까? 365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날짜? 횟수?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홀로그램 문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 지역의 지도가 펼쳐졌다. 장치 자체가 작은 프로젝터 역할을 하는 듯했다. 지도는 할아버지의 집 주변 마을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도 위에는 하나의 붉은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붉은 점은 마을 외곽, 뒷산의 중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곳은… 묵은돌 고개로구나.” 할아버지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잡목만 무성해서 인적이 드물지.”

붉은 점은 점점 더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지도의 한 구석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함께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 개의 삼각형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형상이었는데, 기묘하게도 리나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미래 도시의 구조물에서 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저곳으로 가야 해…”

리나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말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 붉은 점이 가리키는 곳에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혹은 이 모든 미스터리의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몸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시간이 그녀를 재촉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장치에 떠오른 지도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붉은 점 위에 또 다른 숫자가 나타났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주황색 숫자. ‘00:15:32’

카운트다운이었다. 15분 32초. 무엇을 위한 시간인가? 리나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이 시간이 끝나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장치를 꽉 움켜쥐었다. 불안과 결의가 뒤섞인 눈빛으로 묵은돌 고개가 있는 뒷산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