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지아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할머니의 정갈한 필체가 시간의 덧없음을 잊은 듯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제 밤, ‘첫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췄던 지아는, 숨을 고르듯 잠시 눈을 감았다. 할머니는 그 어떤 격정적인 감정도 숨기려 노력했던 사람이었지만, 일기장 속 그녀는 달랐다. 투명하고, 여리고, 때로는 비탄에 잠겨 있었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넘어와 오래된 나무 탁자 위에 부서졌다. 지아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잉크가 번지고 희미해진 글씨로 쓰인 날짜가 보였다.
1952년 8월 15일, 그해 여름은 너무 길었다.
“…서울은 아직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날이 태반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삯바느질을 하며 우리 남매의 입에 풀칠을 하셨다. 나는 내 이름처럼 지혜롭게 살고 싶었지만, 어린 나이에 짊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그이와 함께 꿈꿨던 작은 마당의 집, 그곳에 심을 예쁜 꽃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젠가 다시 평화가 찾아오면, 나는 이 비통한 시간을 잊지 않고 더 단단하게 살아가리라. 나는 낡은 솥단지를 들고 동네 어귀를 돌며 엿을 팔았다. 땀방울이 눈을 가려도 멈출 수 없었다. 내 안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가 작게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가장 힘들었던 순간, 나는 시장통 구석의 텃밭에 몰래 씨앗을 심었다. 그 작은 땅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이었고, 잡초만 무성했지만, 나는 그곳에 내 희망을 심었다. 이름 모를 풀들이 가득한 그곳에, 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채송화 씨앗을 심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언젠가 그곳에 붉은 꽃들이 가득 피어나, 내 절망을 덮어주리라 믿었다. 그 꽃들이 피어나면,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아는 할머니의 글 앞에서 숨을 멈췄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젊은 시절의 고통에 대해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때는 다들 힘들었어”라는 무심한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기장 속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버텨내고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채송화’라니. 그 작은 씨앗에 할머니의 모든 절망과 희망이 담겨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지아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아는 요즘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안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그녀의 나약함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없는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심고, 끈질기게 삶을 일궈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기장은 다음 페이지로 이어졌다. 몇 년이 지난 듯, 글씨체는 한층 더 견고해져 있었다.
1957년 5월 10일, 작은 새 한 마리
“…시장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나는 그 텃밭으로 향했다. 처음엔 메마르고 황량했던 그곳에 정말 채송화가 붉은 얼굴을 내밀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한 송이, 두 송이, 그리고 무더기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나는 결심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저 꽃들처럼 질기게 살아남으리라.
그 텃밭 한쪽에는 그이가 나무를 깎아 만들어주었던 작은 새 조각상이 묻혀 있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 장소였다. 전쟁이 터지기 전, 그이가 떠나면서 꼭 다시 돌아와 이 새를 찾아 함께 새 집에 둘 것을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매일 그 새가 묻힌 곳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비록 그이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나는 이 작은 새 조각상만이라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속은 비록 지켜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약속이 품고 있던 희망만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조각상은 늙은 은행나무 뿌리 아래, 내가 만든 작은 돌무덤 속에 숨겨져 있었다. 나를 찾아올 누군가에게 전해질 희망의 증표처럼….”
낡은 일기장 속에서 툭 하고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웠다. 낡은 사진이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옆에는 늠름한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할머니의 ‘그이’일까. 청년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새 조각상이 들려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할머니의 필체로 “희망을 담은 새”라고 쓰여 있었다.
나무 새 조각상. 늙은 은행나무 뿌리 아래 작은 돌무덤. 할머니가 숨겨둔 희망의 증표. 지아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보내는 절절한 메시지였다.
지아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의 낡은 집 뒤뜰에는 수십 년 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할머니가 ‘늙은 은행나무’라고 칭했던 그 나무가 분명했다. 지아는 일기장을 품에 안고 망설임 없이 뒤뜰로 향했다. 그곳에 할머니의 숨겨진 희망이, 그리고 자신을 위한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바람이 은행나무 잎을 스치며 속삭였다. 지아는 할머니의 시간을 더듬어, 낡은 은행나무 뿌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할머니의 오래된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과연 그곳에서 지아는 할머니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