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아파트 13층, 지연의 작은 세상은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만큼이나 위태로웠다. 뉴스는 온통 ‘정체불명 감염병’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뒤덮였고, 확진자 그래프는 가파르게 치솟아 통계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바깥 세상은 웅성거리는 거대한 야수 같았다. 앰뷸런스 사이렌과 경찰차의 경적, 그리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것들이 지연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그녀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재택근무용 노트북 화면을 노려봤지만, 이미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지 오래였다.

쿵.

작은 소리였다. 거실 책장 쪽에서 나는. 지연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혹시 옆집인가? 요즘은 층간소음보다도 ‘옆집은 괜찮을까’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다시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정적만이 아파트를 가득 채울 뿐. 그녀는 “젠장, 예민해졌나 봐.”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쿵, 쾅. 이번엔 확실히 책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연은 망설이다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 앞에는 바닥에 엎어진 책 한 권이 있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꽤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다.

“이게 왜 떨어져?”

지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삐뚤어진 것도 아니었고, 다른 책들과의 간격도 충분했다. 책을 주워 제자리에 꽂아 넣고, 왠지 모를 한기에 팔을 문질렀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려고 누웠을 때였다. 분명 모두 잠가두었던 화장실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착각일 거야. 바람 때문에 그랬을 거야.”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이미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곧이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 지연은 용기를 내 이불을 걷어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불을 켜자, 수도꼭지는 굳게 잠겨 있었고, 세면대에는 물방울 하나 없었다. 다만, 거울에 김이 서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샤워를 하고 나간 것처럼.

다음 날, 지연은 커피를 내리려다 깜짝 놀랐다. 분명 전날 밤 깨끗하게 씻어두었던 칼이 싱크대 모서리에 꽂혀 있었다. 칼날이 위를 향한 채. 그리고 그 옆에는 정체 모를 진득한 액체가 흥건했다. 피는 아니었다. 끈적하고 탁한 색이었다. 마치 썩은 과일즙 같기도 하고, 오래된 기름 같기도 했다. 소름이 돋아 칼을 집어 들 수조차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세제를 뿌려 씻어냈다.

“누가 장난치는 건가? 내가 이렇게까지 둔했나?”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이 아파트에는 지연 혼자 살았다. 애초에 누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현관문은 이중 잠금이었고, 창문은 13층. 외부 침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날 오후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벽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처음엔 쥐인가 싶었다. 하지만 소리는 점차 커지고 불규칙해졌다. 마치 날카로운 손톱으로 벽지를 찢어내는 듯한 소리. 지연은 덜컥 겁이 나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고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벽 전체에서, 천장에서, 심지어 바닥에서도 긁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집 전체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가장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지연은 저녁을 먹으려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식탁 위, 그녀가 늘 휴대폰을 두던 자리에 이상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잃어버린 머리핀, 어제 밤 찢어 버린 전단지 조각, 그리고… 검게 변한 마른 밥풀 몇 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배열해 놓은 것처럼 어설프게 원을 이루고 있었다. 무언가를 애써 모방하려는, 그러나 실패한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지연은 속에서부터 치미는 역겨움에 토할 것 같았다. 이것은 도저히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TV가 저절로 켜졌다. 화면은 지직거리는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사이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시 기능 마비… 생존자 확인 불가능… 추가 지원 요청… 외부 접근 차단…”

단어들이 뚝뚝 끊어져 들려왔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바깥 세상은 이미 끝장나고 있었다.

TV 화면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정지된 화면 속에서, 지연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흐릿한 형체를 보았다. 키는 그녀보다 조금 작고, 윤곽은 뭉개져 있었다. 마치 젖은 신문지로 만든 인형 같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서 있었다.

지연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차가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뒤를 보려 했지만, 몸은 돌처럼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TV 화면 속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마치 액체를 마시는 듯한, 축축하고 불쾌한 소리를 냈다. 쩝, 쩝, 쩍.

지연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식탁 위, 아까 그 기괴한 배열 속에서 밥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것들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쿵!

갑자기 거실 창문이 쾅 하고 열렸다. 강한 바람이 불어닥쳐 커튼이 미친 듯이 나부꼈다. 그리고 창밖에서, 멀리서 들려오던 웅성거림과 비명 소리가 이제 훨씬 더 가깝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들은 더 이상 앰뷸런스나 경찰차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짐승들이 굶주림에 울부짖는 듯한, 광기 어린 소리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TV 화면 속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리고는 검은 화면 위로 손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길고 가늘며, 기형적으로 꺾인 손가락들이 선명했다. 그것은 인간의 손자국이 아니었다.

지연은 마침내 제정신을 차렸다. 테이블 위 밥풀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현관문으로 달려가려는데, 갑자기 몸이 휙 하고 돌려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챈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 연… 아…”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끔찍하게 왜곡되고 늘어진, 마치 썩어가는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연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정면을 보자,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 조각들 사이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듯 번져나가더니, 이내 액자 조각들을 감싸 안으며 이상한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핏줄이 불거진 엉성한 팔 같았다. 팔은 천천히 움직여, 바닥에 흩어진 액자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칠흑 같은 바깥 복도에서, 불분명한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을 느릿하게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로부터, 척추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이 아파트에서 들려오던 모든 기이한 소리들을 압도하며, 지연의 심장을 찢어놓는 듯했다.

지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 안과 밖, 모두가 지옥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벽에서 튀어나온 검은 팔이 그녀의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