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파멸의 서곡

장대한 천산(天山)의 봉우리들이 운해(雲海)를 뚫고 솟아 있었다. 그중 가장 높고 영험한 백련봉(白蓮峰) 정상에는, 천계(天界)의 신전을 옮겨놓은 듯 휘황찬란한 누각들이 새하얀 대리석 기단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오대세가(五大世家) 중 하나이자, 천하 제일 검술 문파로 칭송받는 백련검문(白蓮劍門)의 문주 취임식 겸 천하 제단 봉헌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수많은 문파의 장로들과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들 하나하나의 기세만으로도 백련봉 주변의 영기(靈氣)가 요동치는 듯했다.

그 장엄한 광경의 한편, 봉헌식의 주역인 백련검문의 새 문주, 백령(白靈)은 빛나는 비단 도포를 걸치고 연단 중앙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새하얀 검기와 함께 아홉 개의 영검이 신령스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이는 그가 백련검문의 역대 문주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능을 지닌 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증표였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감돌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번뜩이는 야심과 서늘한 권력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겹겹의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낡아빠진 회색 도포에 깊게 눌러쓴 삿갓이 나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의 누구도, 심지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하급 제자조차도, 한때 백령과 천하를 호령하던 쌍벽이라 불렸던 ‘형운(形雲)’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할 터였다. 어쩌면 그 이름은 이제 과거의 전설 속에서조차 지워졌으리라. 육신은 조각났고, 영맥은 찢겨나갔으며, 모든 기력은 산산조각 났던 비극적인 과거. 겨우 숨만 붙어 살아남아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문주 백령 대인께서는 실로 강림하신 선인이십니다! 어찌 이리 뛰어나신 분이 계시는지! 백련검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한 중소 문파의 장로가 아첨하듯 목청을 돋우며 외쳤다. 백령은 그저 고개를 숙여 화답할 뿐이었으나, 그의 눈은 연단의 맨 앞줄에 앉은 오대세가 수장들의 얼굴을 스캔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경의와 두려움을 계산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찬란한 성공. 내가 그의 발아래 짓밟히고 모든 것을 잃은 대가로 얻은 찬란함.

내 왼손은 도포 소매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 끝은 이제 영력이 아닌, 한기를 머금은 기이한 기운으로 꿈틀거렸다. 지난 5년간, 나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이 새로운 힘을 익혔다. 오직 복수만을 위한, 파괴만을 위한, 차가운 증오로 빚어진 힘.

“형운아,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백련검문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이상을 위해.”

오래 전, 저 연단 아래의 작은 언덕에서, 백령은 나의 손을 잡고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맹세했었다. 맹세의 밤은 달빛 아래 붉게 물들었고,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검이 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 맹세는 결국 나의 심장에 꽂힌 그의 검촉만큼이나 차갑고 잔인한 거짓말이었다. 그의 검은 내 단전(丹田)을 꿰뚫었고, 나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백련검문의 문주 자리를 탐한 그의 야심에, 나는 제물이 되었다.

그는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내 안에 남아있는 한 조각의 증오가, 꺼져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나는 이름 없는 영산(靈山)의 동굴 속에서,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감내하며 독과 어둠의 기운을 흡수했다. 이제 내 몸은 과거의 백련검문의 청정하고 고결한 기운과는 완전히 다른, 칠흑 같은 파멸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주 백령, 이제 봉헌을 시작하시지요!”

문파의 최고 장로가 백령에게 신호를 보냈다. 백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단 중앙의 제단으로 걸어갔다. 제단 위에는 과거 백련검문의 영웅들이 사용했던 영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 검신에 푸른 기운이 서려 있는 ‘청룡검(靑龍劍)’이 보였다.

청룡검. 그 검은 원래 나의 것이었다.
문주께서 나에게 하사했던, 내 영혼과도 같던 검.
그것을 지금 백령이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한 그의 소유물인 양.

순간, 나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일그러졌다. 온몸의 핏줄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억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통제 불능의 파도를 일으키며 내 안에서 격렬하게 일렁였다. 삿갓 아래의 내 얼굴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백령이 청룡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신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늘로 솟구쳤다. 주위에서는 경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백련검문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봉헌식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모든 시선이 백령에게 집중된 바로 그 순간,

팟!

연단 중앙, 백령의 발밑에서 칠흑 같은 그림자가 섬광처럼 솟아올랐다. 그림자는 제단을 휘감고 백령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환호성은 순간 정지했고, 장내에는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이 퍼졌다.

“무, 무엇이냐!”

백련검문의 장로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백령 역시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냉철함을 되찾고 청룡검을 들어 그림자를 향해 겨눴다.

“감히 백련검문의 봉헌식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피어난 원한이 응축된 것 같았다.

“너는… 잊었느냐?”

갈라진 목소리가 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깃들어 있었고, 분명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잊었느냐고 물었다, 백령.”

점점 그림자가 짙어지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삿갓 아래, 얼굴은 여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었지만, 비쩍 마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 어떤 강력한 고수조차 압도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백령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의 눈빛에 당황과 함께 낯선 공포가 스치고 지나갔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백령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는… 네가 죽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림자. 네가 짓밟았던 영혼의 잔해. 네가 영원히 지워버리려 했던 파멸의 서곡이다.”

나는 삿갓을 천천히 벗어 던졌다.
햇빛조차 침범할 수 없었던 어둠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핏줄이 비쳐 보이는 깡마른 얼굴, 깊게 파인 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꼬리는 섬뜩하게 비틀려 올라가 있었고, 온몸에 죽음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백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손에 들린 청룡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봉헌식에 참여했던 모든 장로와 고수들 사이에서 경악과 혼란의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형… 형운? 살아 있었나?”

“말도 안 돼… 그가 어찌…”

나의 이름이 오랜 망각의 터널을 뚫고 터져 나오자, 백령의 얼굴은 순간 창백해졌다. 그가 애써 부여잡았던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의 목소리에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위풍당당한 백련검문의 문주가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에 몸서리치는 비겁한 자일 뿐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네가 심장을 꿰뚫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혼은 결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연단의 백령을 향해 나아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 칠흑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주위의 영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백령, 너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나의 명예, 나의 힘, 나의 문파, 그리고 나의… 심장까지.”

나의 눈빛은 마치 지옥에서 솟아난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위에 작은 칠흑색 구슬이 떠올랐다. 그 구슬 안에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증오가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이제, 네가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피식, 찢어진 입가로 핏빛 웃음이 흘러나왔다.
구슬은 순식간에 거대한 검은 칼날로 변하더니, 섬광처럼 백령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백령은 간신히 청룡검으로 그 일격을 막아냈으나, 그의 몸은 수십 장을 밀려나 제단 기둥에 부딪혔다. 기둥에는 금이 갔고,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주위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숨을 죽였다. 한때 백련검문의 쌍벽으로 불렸던 두 거인이, 파멸의 서곡을 알리는 피의 춤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춤의 끝에 백령의 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복수의 기록을 새겨 넣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