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도시의 밤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의 십육 층. 지훈은 모니터의 푸른빛에 의존해 늦은 시간까지 디자인 시안을 만지고 있었다. 삑, 삑. 마우스 클릭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늘게 메웠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세상과의 연결고리는 점점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의 시작은 사소했다. 책상 위, 늘 제자리에 있던 연필꽂이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찌걱, 하는 아주 작은 소리. 그는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눈을 비볐다. ‘환각인가.’ 시안 수정에 집중하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연필꽂이는 원래의 자리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 있었다. 설마.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늘 정돈되어 있던 책꽂이의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고대 문명의 신비』. 지난주에 읽다 만 책이었다. 지훈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어제 깜빡하고 떨어트렸나?” 웅얼거리며 책을 주워 다시 꽂아 넣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그 ‘사소한’ 일들은 일상이 되어갔다. 주방 선반 안에서 유리컵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새벽녘에 들려오는 낡은 마룻바닥 삐걱거리는 소리,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처음엔 보일러 문제, 층간 소음, 건물 노후화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지훈의 귀를 향해 직접적으로 울리는 듯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침대 위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 같았다. 스윽, 스윽. 슬리퍼를 끄는 듯한 소리.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구지? 도둑인가?’ 혼자 사는 아파트였다. 문은 분명히 잠갔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눌렀다. 환해진 거실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저, 왠지 모르게 한기가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그대로 차갑게 남아있는 것처럼.

지훈의 일상은 무너져 내렸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낮에는 출근하는 척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환영이 보였다. 흐릿한 형체가 주방과 거실을 오가는 모습. 시야 한구석에 맴도는 검은 그림자. 그는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예민해졌다.

“여보세요? 지훈아, 너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 엄마. 나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그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누가 믿어줄까. 그저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할 뿐일 거라고.

어느 날 새벽, 침대에서 잠결에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발치로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이불은 침대 아래로 절반쯤 내려가 있었고, 발끝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혼자니?”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땀방울. 그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히,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날부터, 현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주방에서는 컵과 접시들이 선반에서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지훈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거실의 TV는 시도 때도 없이 저절로 켜졌다. 지지직거리는 백색 노이즈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의 형상이 깜빡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 밖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삭, 삭, 삭. 마치 손톱으로 문을 긁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였다.

지훈은 거의 폐인이 되어갔다. 며칠 밤낮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눈은 충혈되어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식칼을 품에 안고 밤을 새웠다.

“이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뭘 원하는 거냐고!”
그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의 큰 유리 화병이 둥실 떠올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그의 눈앞에서 박살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는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한 적의였다.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집착 어린 시선과 기분 나쁜 소리들로 가득 찬, 거대한 함정이었다.

어느 날 밤, 지훈은 침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모든 불이 꺼졌다. 아파트 전체가 정전이 된 듯했다. 창밖의 도시 불빛만이 흐릿하게 그의 방을 비췄다.
침묵.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끈적한 침묵이 공간을 압도했다. 그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때, 침실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이어서, 거실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소음이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가구들이 제자리에서 부딪히는 소리,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벽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마치 거대한 손이 아파트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다.
지훈은 침대 모서리로 몸을 웅크렸다. “아, 안 돼… 제발….”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들이 보이는 듯했다.
침실의 벽이, 천장이, 바닥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벽에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것 같았고, 천장에서는 낡은 시멘트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방 안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귀에 다시 속삭임이 들렸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선명했다.
아주 오래된, 기이하고 낯선 언어였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지훈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더 이상 벽에서 액체가 흐르지도, 천장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너무나도 고요하게.

지훈은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통과 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더 이상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방을 나선 그는 거실로 향했다.
깨져 있던 화병 조각들은 온데간데없었다. TV는 꺼져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훈은 아파트의 모든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는 창밖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불빛들,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아파트에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를.

그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잠겨 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밖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텅 빈 아파트 안에서, 그의 시선은 멈췄다.
거실 한가운데, 오래된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아주 희미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억지로 긁어낸 것처럼.

『환영한다. 새로운 주인을.』

지훈은 그 글자들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둡고 차가운 빛이 그 속에서 번득였다.

그는 다시 문을 닫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십육 층의 아파트는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겼다.
다음 날,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지훈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며칠째 이웃들의 소음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그의 연락 또한 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문은 굳게 닫힌 채로 남았다.
그 안에서 무엇이, 혹은 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아파트에 들어서는 이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모두, 결코 혼자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