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3화: 심연의 울림
에테리움 대도서관, 지하 심층 서고. 공기는 차고 습했다. 몇백 년간 빛 한 점 들지 않은 이곳은 거대한 미로와도 같았다. 먼지 섞인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카이젤에게는 이미 익숙한 고향의 향기나 다름없었다. 어깨에 멘 낡은 등유 램프가 희미한 빛을 토해내며 주변의 고서들을 비췄다. 고대 문명의 유물처럼 느껴지는 두꺼운 책등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카이젤은 오늘로 벌써 닷새째 이 미분류 구역을 헤매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연금술 재료의 재고 목록을 찾는 일이었지만, 사실 그는 이 서고의 진정한 비밀을 직감하고 있었다. 대도서관의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숨겨진 통로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 그것이 그를 이 기이하고 위험한 공간으로 이끌었다.
“젠장,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아무리 얇은 옷을 입었대도 이 무거운 서책들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의 눈은 낡은 서가들 사이를 훑었다. 겹겹이 쌓인 책들은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고, 어떤 것은 이미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때였다. 그의 시선이 서가들 사이, 유난히도 어둡고 좁은 틈새에 닿았다.
다른 서가들과는 다른, 뭔가 이질적인 느낌. 그는 망설임 없이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먼지 구름이 일었고, 퀘퀘한 냄새가 더욱 강해졌다. 몇 걸음 나아가자, 틈은 점차 넓어지며 작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등불을 높이 들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서고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사방이 깎아 만든 듯 매끄러운 흑요석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방. 공기마저 웅웅거리는 듯한 묘한 정적이 흘렀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옅은 빛을 발하며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의 한가운데.
흡사 심장이 고동치는 듯, 미약하지만 분명한 진동을 내뿜는 검은 수정이 솟아 있었다. 그 어떤 장식도 없이, 오직 순수한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그 수정은 카이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차가운 전율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그는 숨을 죽였다. 마치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이 고요가 깨어질 것만 같았다.
“이게…… 뭐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도서관의 그 어떤 기록에도 이런 곳은 없었다. 아니,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인공물이 아니었다. 태고의 존재가 빚어낸 듯한,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섬뜩한 위압감을 풍기는 물체였다.
카이젤은 홀린 듯 검은 수정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문양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수정 앞에 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수정만이 미지근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거대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끌림이 그를 지배했다. 손가락 끝이 검은 수정의 매끄러운 표면에 닿는 순간.
**콰아아아앙!**
세상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정적이 깨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폭발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수정에서 검은 빛줄기가 솟구쳤다. 동시에 방 전체의 문양들이 격렬한 섬광을 터뜨리며 그의 시야를 집어삼켰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감았지만, 소용없었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다. 마치 존재 자체가 해체되는 듯한 감각. 혈관 속을 흐르던 피가 얼어붙었다가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반복했다.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와 동시에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 역겨움과 황홀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크아아아악!”
인간의 성대가 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뒤섞여 혼돈의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를 잡아먹고, 노란색이 검은색을 토해내는 기괴한 풍경.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음의 웅웅거림이 뇌를 울리다가, 한순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부딪히는 소리로 변했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한 순간이 영원이 되고, 영원이 다시 찰나로 축소되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이미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대한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모습, 행성들이 충돌하여 새로운 세계를 빚어내는 광경, 이름 모를 고대 존재들이 공간을 찢고 나타나 춤을 추는 환영. 이 모든 것이 마치 그의 기억인 양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는 카이젤이 아니었다. 동시에 카이젤이었다. 거대하고 무한하며, 동시에 너무나 작은 존재였다.
귓가에 속삭임이 들렸다.
*…태초의 율동이여…*
*…시원의 노래여…*
*…이제 눈을 떠라…*
그 속삭임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진동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깊은 본능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뒤틀렸다. 피부 아래로 푸른빛의 문양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 바닥의 문양과 똑같았다. 수정을 감싸고 있던 빛이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고통은 더욱 심해졌지만, 그 안에 묘한 쾌감이 섞여 있었다. 존재하지 않던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공간의 틈새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을 읽고 있다고 믿었다. 보이지 않던 실들이 세상을 엮고 있는 것을 느꼈다.
문득, 고통 속에서도 선명한 의식이 떠올랐다.
*이 힘은… 나를 부수고 있어.*
*아니, 나를… 다시 만들고 있어.*
점점 더 많은 힘이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수정은 빛을 잃고 희미해졌지만, 대신 카이젤의 몸이 그 빛으로 번뜩였다. 푸른 문양이 온몸을 뒤덮고, 그의 눈동자는 심연의 검은색과 우주의 푸른색이 뒤섞인 기묘한 색으로 변해갔다.
갑자기, 방 전체를 뒤흔드는 깊은 울림이 들려왔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대도서관, 아니, 어쩌면 이 세상 전체의 존재를 뒤흔드는 듯한 진동이었다. 카이젤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혼돈의 색이 아니었다.
방의 흑요석 벽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저적. 금이 가는 소리가 고요했던 서고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로,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카이젤은 보았다. 어둠 속에 잠긴, 고대의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기분 나쁜 기운이 몰려왔다.
카이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단지 이 힘을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힘을 해방시켰고, 동시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운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을 터였다.
온몸의 힘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의식은 더욱 또렷해졌다. 손끝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깨어난 힘이 그의 몸 안에서 스스로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아직 통제 불능이었다.
거대한 균열이 방 한쪽 벽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먼지와 잔해 속에서 솟아오른 것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거대한 그림자 생명체였다. 피를 보지 않아도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 존재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카이젤을 향해 거대한 입을 벌렸다.
그것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태초의 공포, 심연의 파편이었다.
방금 깨어난 힘이 그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카이젤은 비틀거렸다. 그의 정신은 이제 막 깨어난 엄청난 힘과, 눈앞에 나타난 압도적인 공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거대한 그림자 생명체가 발톱을 휘둘러 카이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피할 곳은 없었다.
카이젤은 온몸의 고통 속에서도, 새로이 각성한 두 눈으로 그림자 괴수를 노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시원의 율동이 격렬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