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은 늘 그랬듯 웅성거렸다. 낮 동안 뿜어낸 소음과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또 다른 활기가 어둠을 채우며 빌딩 숲 사이로 아스팔트의 열기를 흩뿌렸다. 김준호는 이 모든 소음과 빛,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무수한 삶의 조각들이 마치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거대한 생명체의 뱃속, 17층 그의 아파트 창문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현란하게 부서져 들어왔다.
준호는 맥주캔을 한 모금 들이켰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캔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평범한 퇴근 후의 일상.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그의 평온이 얼마나 취약한 유리 조각 위에 놓여 있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젠장.”
책상 위, 분명 똑바로 세워뒀던 펜이 스스로 굴러 떨어졌다. 톡,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피곤한가. 어깨를 으쓱하며 펜을 주워 올렸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낡은 건물이라거나, 책상이 수평이 아니라거나 하는 시시한 이유들.
다음 날 밤은 좀 달랐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잡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펼쳐진 채로. 그것도 그가 읽던 페이지가 아닌, 전혀 다른 페이지가 펼쳐진 채. 등골이 오싹했지만, 준호는 애써 무시했다. ‘창문이 열려 있었나? 바람이 세게 불었나?’ 그러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흘 밤이 더 지났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거실에서 옅은 ‘딸깍’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듯한 소리. 준호는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후, 다시 ‘딸깍’. 그리고 어둠 속에 잠긴 거실 저편에서, 아주 희미하고 쉰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늙은 이가 속삭이듯, 그러나 정확한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질적인 소리.
준호는 벌떡 일어났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거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전등 스위치는 멀쩡히 꺼져 있었고,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테이블 위의 잡지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펜은 이미 오래전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한동안 거실 한가운데 서서 텅 빈 공간을 노려봤다. 이 모든 게 단지 피곤함이 빚어낸 환청과 착시일까?
다음 주가 되자 현상은 노골적으로 변했다. 퇴근 후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상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식탁 의자가 뒤틀려 있거나,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거나, 현관 신발이 짝짝이로 놓여 있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집에 침입한 건가 싶어 경찰에 신고했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도난당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밤이 되면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침대 머리맡 벽에서 긁는 소리, 천장에서 무언가 질척이는 듯한 소리. 때로는 어딘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그러나 명확히 그의 아파트 안에 존재하는, 낯선 언어로 읊조리는 듯한 낮은 중얼거림. 꿈속에서도 그 소리는 이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늘어갔고, 그의 안색은 급격히 나빠졌다.
“준호 씨, 괜찮아요? 요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점심시간, 동료 이지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준호는 억지로 미소 지었지만, 입꼬리는 떨렸다.
“아니, 그냥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스트레스가 좀 많아.”
“무슨 일 있어요? 얘기해봐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준호는 잠시 망설였다. 이 말을 하면 이지혜가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 견딜 수 없었다.
“지혜 씨… 내가 이상한 소리를 좀 할 건데,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는 조심스럽게 지난 몇 주간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펜이 굴러 떨어지고, 잡지가 저절로 움직이고, 밤마다 들려오는 긁는 소리와 알 수 없는 중얼거림까지. 이지혜의 표정은 처음에는 걱정에서 의아함으로, 이내 당황스러움으로 변해갔다.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은 거 말하는 거예요? 영화 같은 데서나 나오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고, 나중엔 누가 나를 골탕 먹이는 줄 알았지. 근데 아니야. 집에 CCTV를 설치했는데, 아무도 없어. 근데 물건은 계속 움직여.”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묻어났다. 이지혜는 컵에 든 커피만 휘젓고 있었다.
“그럼… 이사를 가는 게 제일 빠르지 않을까요? 일단 그 집에 더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쉽지 않아. 보증금 문제도 있고, 게다가 이사 간다고 이게 끝날까? 내 착각이라면, 어디를 가도 따라올 거 아니야.”
준호의 눈빛은 깊은 피로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일렁였다.
그날 밤, 아파트로 돌아온 준호는 현관문을 열기 전 한참을 망설였다.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은 암전이었다. 스위치를 켜자, 쨍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광경에 그는 숨을 들이켰다.
식탁 의자들은 모두 거꾸로 뒤집혀 있었고, 그 위에 컵과 접시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책들이 찢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명백한 파괴였다.
“누구야! 누구냐고!”
준호는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 순간, 부엌 쪽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급히 달려가 보니,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들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로, 검붉은 액체가 마치 피처럼 번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냄새는 지독했다. 비린 철 냄새와 함께 썩어가는 듯한, 끈적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갑자기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파르르, 파르르. 어둠과 빛이 불안정하게 번갈아 가며 실내를 비췄다. 그리고 그 빛과 어둠의 경계 속에서, 벽 한가운데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벽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어둠이 덩어리져 일렁이는 형체.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불규칙하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촉수 같은 그림자들, 그리고 그 중심에 희미하게 빛나는, 수십 개의 눈동자 같은 흉측한 형상이.
준호는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현실이 아니야. 이건 꿈이야. 하지만 끈적한 악취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고, 눈앞의 광경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림자가 마치 그를 향해 팔을 뻗는 것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벽 자체가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그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더 가까이에서.
*“크툴루 프타그… 욘나시 프타그… 가’하른…”*
알 수 없는, 그러나 듣는 순간 정신을 마비시키는 듯한 고대 언어. 그 소리는 그의 뇌 속을 직접 울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준호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다음 순간,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격렬한 진동이 시작됐다. 천장의 전등이 떨어져 내릴 듯 흔들렸고, 창문 유리가 깨질 듯이 덜덜 떨렸다.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준호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현관문으로 향했다. 살아야 한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이 알 수 없는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고리를 잡고 온몸으로 잡아당겼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등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는 더 이상 벽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거실 한가운데에, 어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체가 솟아 있었다. 명확한 형태는 없었다. 그저 움직이는 어둠, 그 안에 무수히 박힌 눈동자들, 그리고 질척이는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듯한 형상.
그것은 준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응시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모든 우주적 공포를 그의 정신에 쏟아붓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존재가, 그의 자아가, 한없이 작고 무의미한 조각으로 찢겨져 나가는 느낌.
*“네가… 우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명확한 한국어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내는 듯, 수만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한 끔찍한 음성이었다. 그의 고막을 찢고, 정신을 파괴하는 듯한 음성.
“아… 안 돼…”
준호는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정신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무수한 촉수들이 뻗어 나와 그를 감싸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차가운 점액질이 온몸을 휘감고,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존재를 으스러뜨리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이웃 주민들이 17층 준호의 아파트 문 앞에서 웅성거렸다. 어젯밤 내내 들린 괴이한 소음과 진동 때문이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출동해 강제로 문을 열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가구들은 뒤집히고, 벽지는 찢겨 있었으며, 바닥에는 검붉은 액체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혈흔은 아니었다. 그 어디에서도 준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그가 처음부터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부엌 한쪽 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기호들이 붉은 액체로 휘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호들 사이로, 마치 경고처럼, 혹은 약속처럼, 단 한 단어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열렸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웅성거렸다. 그러나 17층, 이제 비어버린 그 아파트의 창문 뒤편에는, 이전에는 없던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균열 너머에는 어둠이,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무언가가, 차가운 눈으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