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3화

밤은 깊었지만, 미나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얇고 바랜 종이 위, 서툴지만 또렷한 글씨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 심장을 그대로 움켜쥐고 흔드는 듯했다. 지난 장에서, 미나는 순수한 사랑에 빠진 십대 소녀 은자의 설렘과 그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엿보았다. 그 소년, 지훈과의 약속이 적힌 페이지에서 미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 시간은 불길하게 흘러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는 먹구름이 낀 듯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글씨체는 더 거칠어졌고, 문장 곳곳에는 알 수 없는 얼룩이 번져 있었다. 미나는 손끝으로 그 얼룩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마치 할머니의 눈물 자국 같았다.

1950년 7월 20일.

아침부터 마을이 소란했다. 낯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쳐 젊은이들을 모았다. 지훈 오빠는 나를 붙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무서웠지만, 오빠의 눈동자 속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작게 느껴져 차마 울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소매 끝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군인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떼어 놓았다. “금방 돌아올게, 은자야. 약속해.” 그게 오빠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뒷모습이 붉은 흙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후로 하늘은 계속해서 붉게 물들었다. 우리의 세상은 산산조각 났다.

미나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제야 그 얼룩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을 그 잔혹한 이름. 미나는 TV나 책에서만 접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증언이었다.

이어지는 페이지들은 더욱 비참했다. 식량 부족, 피난, 가족들의 뿔뿔이 흩어짐. 은자는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굶주림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 고통 속에서도 지훈 오빠를 향한 기다림은 일기장 곳곳에 스며 있었다.

1951년 1월 5일.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렸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으니 잠시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 겨울밤 같다. 피난지에서도 오빠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나 오빠가 돌아와 나를 찾을까 봐,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지만 항상 주변을 살피고 있다. 오빠가 선물해 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오빠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정말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빠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젠 그 얼굴마저 희미해지는 것 같아 두렵다.

사라진 약속

미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는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절망했을까. 평생을 강하고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살아온 할머니에게 이런 여리고 부서지기 쉬운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는 미나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1951년 8월 12일.

소식을 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닐 거라고, 잘못 들은 거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의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지훈 오빠가… 북쪽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유해도 찾을 수 없고, 그저 ‘전사’라는 한마디만 전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내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내 안에 숨 쉬던 모든 희망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밤새도록 울었다. 눈물이 말라버릴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아무리 울어도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가 약속했던 ‘금방 돌아올게’라는 말이 나를 옥죄었다. 살아남은 것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오빠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미나는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페이지를 붙들고 흐느꼈다. 이 모든 슬픔과 상실감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온 할머니의 무게가 미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강인했던 할머니의 삶 이면에, 이토록 깊고 아픈 상흔이 숨겨져 있었다니.

다음 페이지는 찢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찢겨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뜯어낸 듯, 거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은자 할머니 자신이 견딜 수 없어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 뒤로는 한동안 글이 없다가, 이듬해 봄의 기록이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1952년 3월 25일.

시간은 흐른다. 내가 원치 않아도 아침은 오고, 해는 뜨고 진다. 여전히 오빠의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니지만,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울 시간도, 울 기운도 없다.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고,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내 심장 한쪽은 이미 죽어버린 것 같지만, 나는 살아가야 한다. 오빠의 몫까지, 내가 살아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언젠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숨 쉬는 법을 잊지 않는 것이 목표다.

미나는 일기장을 천천히 덮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할머니의 슬픔이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방 한구석에 놓인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스무 살 남짓의 할머니. 그 웃음 뒤에 이런 깊은 상실의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니. 미나는 할머니가 평생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 아픔을 홀로 삼키고 강인한 삶을 살아내셨다. 미나는 그 깊은 슬픔을 견디고 일어선 할머니의 용기와 끈기에 한없이 존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아직 많은 페이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들은 미나에게 또 다른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미나의 방에는 할머니의 아픈 청춘이 남긴 먹먹한 여운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