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3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손때 묻은 표지 너머로 또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다. 첫 장을 넘길 때마다 먼지처럼 부유하던 그리움은 어느새 내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어 따뜻한 온기로 피어났다. 지난번 일기장에서 미처 다 읽지 못했던 이야기는 자꾸만 내 발목을 붙잡았고, 나는 다시 할머니의 유년 시절, 그 아득한 과거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할머니의 방은 정갈했지만, 늘 오래된 물건들 특유의 잔잔한 향이 배어 있었다. 묵직한 나무 가구, 빛바랜 커튼, 그리고 할머니가 앉으시던 푹신한 안락의자.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얇은 종이 위로 할머니의 붓글씨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잉크는 세월의 흐름을 견디며 여전히 굳건했고, 그 글자 하나하나에 할머니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1958년 늦여름, 매미 소리가 귓가를 맴돌던 어느 날.

그날은 유난히도 더웠다. 햇볕은 아스팔트도 녹일 듯 뜨거웠고, 매미는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댔다. 나는 등짐 가득 채소 바구니를 메고 읍내 장터로 향했다. 밭에서 땀 흘려 가꾼 상추와 고추는 붉고 푸른 색깔로 싱싱함을 뽐냈지만, 읍내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흙먼지 가득한 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발바닥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등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 “영숙아, 우리가 살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 힘내거라”가 늘 내 마음을 붙들었다.

장터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갖가지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 흥정하는 사람들의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익숙하게 상추를 다듬고 고추를 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건네도, 선뜻 발걸음을 멈추는 이는 드물었다. 그날따라 유난히도 장사가 되지 않았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나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의 실망한 표정을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때였다. 낡은 삼베 옷을 입고 해진 갓을 쓴 청년이 내 좌판 앞에 섰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흥정하려 들지도, 물건을 꼼꼼히 살피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으며, 세상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듯한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와 눈이 마주쳤고,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낯선 감정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꾸는 듯한 묘한 떨림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상추 한 바구니를 가리켰다. “얼마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주변의 소음을 뚫고 내 귀에 또렷이 박혔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가격을 말했다. 그는 말없이 돈을 내밀었다. 당시에는 흔치 않던 흰색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그려진 그림이 보였다. 나비 한 마리가 활짝 핀 꽃잎 위를 날아다니는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을 내게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 “힘든 날이지만, 당신의 웃음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작은 위로입니다.”

나는 그림을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그것도 그림이라니. 어머니는 늘 “예쁜 얼굴은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는 내게 얼굴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그의 손은 그림을 건네는 순간 스치듯 내 손을 스쳤고, 나는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방금 산 상추 바구니를 들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손에 든 그림에서는 붓과 먹의 은은한 향이 풍겨왔다. 나비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고,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내 시골뜨기 같은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상 같았다. 내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이름도 모르는 그 청년의 따뜻한 눈빛과 위로의 말 한마디가 메마른 내 마음에 한 줄기 소낙비처럼 내렸다. 팍팍하고 고된 삶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걱정조차 잊은 채, 나는 그 작은 그림을 가슴에 품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글은 거기서 멈춰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을 성실하고 강인하게 살아오신 할머니에게도, 저렇게 순수하고 애틋한 순간이 있었다니. 내가 알던 할머니는 오직 억척스럽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존재였다. 하지만 일기장 속의 ‘영숙’은 수줍고, 한편으로는 세상의 짐에 짓눌려 있지만 동시에 희망을 품을 줄 아는 여린 존재였다.

그 청년은 누구였을까? 그림을 선물하며 영숙 할머니의 마음에 불을 지핀 그 남자는.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팍팍한 시골 생활 속에서, 젊은 영숙 할머니에게 찾아온 그 한 줄기 빛은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 내 마음속에는 무수한 질문들이 피어올랐다. 할머니는 그 후로도 그 청년을 그리워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짧은 인연이었을까.

할머니가 주셨던 오래된 결혼사진 속에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셨다고 나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그림을 준 청년은 할아버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이 생각에 미치자 내 심장은 더 거세게 요동쳤다. 할머니의 삶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사랑의 조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다음 장을 넘기려다 멈칫했다. 이 작은 일기장 하나가 할머니의 삶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굽은 허리, 주름진 손, 그리고 언제나 가족을 먼저 생각하던 그 헌신적인 모습 뒤에, 스무 살 영숙이 간직했던 뜨거운 설렘과 아련한 그리움이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마치 미지의 보물 상자를 연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 장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숨을 고르며, 다음 페이지를 펼칠 준비를 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