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텅 빈 방의 노크 소리
칙, 하는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방 안의 조명이 스르륵 꺼졌다.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현실의 자취방 풍경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식되었고, 그와 동시에 미지근한 온기로 피부를 감싸는 무언가 느껴졌다. 나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신경 접속형 게임 장치, ‘미라지’의 인터페이스를 만지작거렸다. 현실의 나른한 피로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몸의 감각이 예리하게 깨어나는 듯했다.
“로그인.”
목소리를 인식한 장치가 이마와 관자놀이에 미세한 압박을 가하며 접속을 시작했다. 짧은 어지럼증과 함께 시야가 열렸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백 층짜리 마천루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넥서스 시티’의 중심가, 그중에서도 내가 머물고 있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 103호의 거실이었다.
탁, 탁, 탁.
낡은 아파트 특유의 나무 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가상현실 속에서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만년 아웃사이더, 강민이었다. 비록 게임 속이지만, 나만의 공간이라는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밖은 여전히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적어도 이 103호는 나만의 안식처였다.
“후우…….”
현실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게임으로나마 풀려고 작정한 나는 습관적으로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넥서스 시티는 리얼리즘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게임이었다. 인게임 화폐를 내고 구입한 가구들은 현실의 내 자취방보다 훨씬 깔끔하고 기능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싸구려 인조가죽 소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홀로그램 TV, 그리고 주방과 거실을 분리하는 작은 아일랜드 식탁. 완벽하게 재현된 현실 속 아파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아침에 접속을 종료하기 전,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스낵 봉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테이블 위를 손으로 쓸어봤다. 플라스틱 재질 특유의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질 뿐, 봉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버그인가? 아니면 누가 내 방에 들어왔다가 나갔나?’
넥서스 시티는 보안이 철저한 게임이다. 다른 유저가 허락 없이 내 개인 공간에 들어올 수는 없다. 해킹이라는 것도 이론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럼 버그인가? 하지만 이런 사소한 아이템 소실 버그는 듣도 보도 못했다. 게다가 테이블 위는 언제나 깔끔하게 비워두는 게 내 습관이었다. 게임 속이라지만, 무언가 너저분하게 널브러져 있는 걸 싫어했으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어차피 게임 속 아이템이었다. 다시 사면 그만이었다. 침대에 털썩 앉아 퀘스트 창을 열었다. 밀려 있는 일일 퀘스트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쿵.
작은 진동과 함께 거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침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소파 맞은편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프레임은 멀쩡했지만, 유리 부분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 액자를 주워 들었다.
“이게 어떻게….”
바닥에 떨어진 파편들을 치우려 고개를 숙인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내 등 뒤에 바싹 붙어 선 것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아무것도 없었다. 넥서스 시티 특유의 도시 소음만이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 아니었다. 분명히 느껴지는 이 한기. 섬뜩한 시선.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거실을 둘러봤다. 잠겨 있어야 할 현관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딸깍.
현관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렸다. 마치 누군가 바깥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당기는 것처럼.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손에 들고 있던 액자는 이미 내팽개쳐진 상태였다.
“누구…야?”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떨리고 있었다. 현실의 공포가 게임 속으로 그대로 전이된 느낌이었다. 분명 이곳은 게임 속인데, 이 모든 감각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어댔고,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현관문 틈으로 어둠이 비집고 들어왔다. 넥서스 시티의 아파트 복도는 늘 밝았고, 소음으로 가득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복도는 마치 밤처럼 어두웠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 꺼진 복도 끝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검은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나는 홀린 듯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왜곡되고 길게 늘어진 형체였다. 찰나의 순간, 그 그림자가 벽에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현관문이 쿵, 하고 닫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게임 속 캐릭터의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다는 시스템 알림이 떴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나를 덮친 것은 게임 버그나 해킹의 범주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폴터가이스트.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왔고,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채,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서 귀신이라도 나온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넥서스 시티는 어디까지나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가상현실이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애써 이성을 부여잡고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려 했다. 그래, 이건 아마도 특수 퀘스트일 거야. 아니면 숨겨진 이스터 에그라거나. 겁먹을 필요 없어, 강민. 넌 그냥 게임을 하는 중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액자 파편은 여전히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깨끗해야 할 테이블 위에는 검은 얼룩 같은 것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니, 끈적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확인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도난당한 물건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스낵 봉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때, 침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또 뭐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침실 문을 열었다. 침대는 가지런했고, 책상 위 노트북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옷장 문이 열려 있었다.
내가 자고 일어날 때마다 항상 닫혀 있었던 옷장 문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옷장으로 다가갔다. 안에는 내 캐릭터가 입을 만한 평범한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런데, 가장 안쪽에 걸려 있던 검은색 코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코트 주머니 속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낡은 종이 한 장이었다. 접혀 있던 종이를 펼치자, 삐뚤빼뚤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나가.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나는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종이는 누가 넣어둔 거지? 메시지는 누가 쓴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나가라니?*
게임에서 나가라는 말인가, 아니면 이 아파트에서 나가라는 말인가?
덜컥.
내 손에 들린 종이가 작은 경고음과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숨겨진 퀘스트 ‘103호의 비명’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퀘스트 내용: 103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세요.]**
나는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숨겨진 퀘스트.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시작될 줄은 몰랐다. 기이한 현상? 폴터가이스트?
그때, 내 귀에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와….”*
목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내 등 뒤, 바로 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귓가를 간지럽히는 차가운 숨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렸다.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 텅 빈 방.
하지만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 정확히 내가 뒤돌아본 그 지점에, 바닥에 떨어져 있어야 할 액자의 유리 파편들이 저절로 움직이며 아주 천천히, 글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돌아와.]**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성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스템 오류? 버그? 아니, 이런 건 게임에서 나올 수 없는 현상이었다. 현실에서는 더더욱.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심장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넥서스 시티 103호, 나의 안식처였던 공간이 순식간에 가장 공포스러운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이곳에 갇히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끓어오르는 미지의 흥분감도 있었다. 이 게임은 아직 나에게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듯했다.
나는 게임을 종료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이 기괴한 현상의 끝을 봐야만 했다. 과연 이 103호는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 걸까? 그리고, 누가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걸까?
창밖으로는 여전히 넥서스 시티의 불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방 안은 어두웠고, 정체 모를 존재의 기척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 발자국, 유리 파편들이 만들어낸 글자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