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절벽 사이로 찢어진 비단처럼 구름이 흘러갔다. 그 아래, 수십 년은 족히 묵었을 법한 고목들이 뒤틀린 팔다리처럼 얽혀 있었고, 그 가지 사이사이로 기괴하게 자란 이끼와 넝쿨들이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이곳은 천하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허나 그 누구도 쉽사리 발을 들이지 못하는 비로암(秘露庵)의 입구였다.
백련도(白蓮刀) 무진은 묵직한 보도를 어깨에 멘 채로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한숨을 내쉬었다. 발아래 밟히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소리가 너무나 선명해서, 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괴한 고요함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그의 중얼거림은 메아리조차 없이 숲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공기마저 무겁게 짓눌러오는 듯했다. 이 높은 산중의 절벽 끝자락, 이름 모를 기운이 감도는 비로암으로 향하는 길은 명백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수많은 고수들이 이 불길한 소환에 응했는가. 명예? 권력? 아니면… 불가피한 운명?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구름 너머로 태양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이 산맥 앞에서 꺾여 버린 것 같았다. 도착 직전에 보았던, 산 중턱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안개가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날씨 변화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기운, 그 끈적하고 역겨운 기운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얼마나 걸었을까. 빽빽했던 숲이 갑자기 끊어지고, 그 앞에 거대한 석문(石門)이 솟아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딘 듯, 검은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그 거대함과 기이한 문양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문양은 문득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비로암의 입구라니.”
문진이 낮게 읊조렸다.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와 그의 얼굴을 스쳤다. 바람은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를 실어 날랐다. 피냄새 같기도, 썩은 살덩이 같기도 한 그 냄새에 무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닫혀있던 석문이 서서히, 그러나 묵직하게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뼈가 갈리는 듯 듣기 싫은 소리를 냈고, 문틈으로 드러난 안쪽 풍경은 무진의 숨을 멎게 했다.
그곳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고요한 절의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지하 동굴을 연상시키는 공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빛 이끼들이 벽을 뒤덮고 있었고, 그 빛은 바닥에 웅성거리는 그림자들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 사이에, 이미 도착한 듯 보이는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서 있었다.
“백련도 무진이군.”
안개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무진은 본능적으로 보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홀 중앙, 작은 단상 위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예리했다. 흡사 오랜 세월을 지켜본 관찰자의 눈빛이었다.
노인 주변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그림자 같은 인물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그들 역시 일체의 소리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압박감을 주었다.
무진은 단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거대한 석문은 굉음과 함께 닫히며 그들을 어둠 속에 가두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어째서 이런 곳에 사람들을 불러모은 거요?”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당파의 장문인, 현무진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상기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입을 열게 한 것은 노인이 아니라, 석문이 닫히면서 느껴진 절박한 위협감 때문이었다.
현무진인의 말에 동조하듯, 다른 고수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소! 천하무림대회라는 미명 아래 이런 으스스한 곳으로 불러들이다니, 대체 목적이 무엇이오?”
“이곳은 비로암이라기보다, 흡사 귀신의 소굴 같지 않소?”
혼란과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 든 육체에서 나오기 힘들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대회. 그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네.”
노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무진 또한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세상의 근원이 뒤틀리고, 혼돈의 균열이 벌어지고 있다. 그 균열을 막지 못하면, 이 세상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서서히 멸망할 것이네.”
“균열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아미파의 장문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인은 차분하게, 그러나 묵직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곳 비로암은 오랜 세월 동안 봉인되어 온 어둠의 틈새를 지키는 곳이다. 봉인의 힘이 약해지고, 틈새를 통해 이계의 그림자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네들을 초대한 이유는… 그 틈새를 다시 봉인할 영웅을 찾기 위함이다.”
“이계의 그림자? 봉인? 그것이 대체 무림대회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한 문파의 장로가 격앙된 목소리로 반박했다. 무진 역시 의문이 가득했다. 무술대회라는 것은 강함을 겨루는 것이지, 이계의 존재와 맞서는 싸움이라니.
“상관이 있다마다. 틈새에서 스며 나오는 기운은 평범한 인간의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네. 그 기운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존재의 근원을 잠식하며, 결국에는 어둠의 하수인으로 변모시킨다.”
노인의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빛났다.
“자네들 중 일부는 이미 그 기운에 노출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고수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무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눈빛에는 의심과 불안이 번져 있었다.
“이 대회는 단순한 무력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육신과 정신, 영혼의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어둠의 기운에 물들지 않고, 균열을 봉인할 진정한 영웅을 찾는 의식. 그것이 바로 ‘천하무림봉인대회’다.”
노인의 선언과 함께, 갑자기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드리워진 푸른 이끼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고, 동시에 어둠 속에서 기괴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마치 수많은 영혼들이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했다.
“크아악!”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 옆에 서 있던 한 중년 무사가 눈을 크게 뜨며 고통스럽게 신음하더니, 이내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검은 핏줄이 불거져 나왔고, 피부는 마치 뱀의 비늘처럼 거칠게 변해갔다. 그의 두 눈은 원래의 색을 잃고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누군가의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그 무사는 주변의 다른 고수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의 손톱은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처럼 자라나 있었고, 입에서는 검은 침이 흘러내렸다.
“어둠의 기운에 잠식된 자들부터 걸러낼 것이다. 대회의 시작은, 봉인의 시험이다!”
노인의 외침과 함께, 동굴 곳곳에서 비슷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웅성거리던 고수들 사이에서, 이미 기괴한 괴물로 변해버린 무사들이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에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무진은 순식간에 보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검기가 눈앞에서 달려드는 괴물을 정확히 꿰뚫었지만, 피가 튀기는 대신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액체는 주변 바닥의 이끼를 태워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이런 빌어먹을…”
무진은 솟아나는 역겨움을 참으며 칼날을 고쳐 잡았다. 이곳은 결코 평범한 무림대회가 아니었다. 운명을 건 싸움이라는 노인의 말이, 비로소 뼈저리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괴물들이, 마치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귀들처럼 날뛰고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은, 바로 생존 그 자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