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화. 천황전(天凰戰) – 피어나는 용린(龍鱗)
핏빛 노을이 진동하는 고대 비무대 위로, 억겁의 세월을 견딘 낡은 돌계단을 단우휘는 한 걸음씩 내디뎠다. 수천, 수만 군중의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그의 귓가에는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만이 선명하게 울렸다. 쿵, 쿵, 쿵. 마치 천지개벽의 전조처럼 격렬한 고동이었다.
“단우휘! 단우휘!”
“천명자! 천명자!”
양쪽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는 극명하게 갈렸다. 단우휘는 신흥 고수, 이름 없는 문파의 그림자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단아였다. 반면, 그가 맞서야 할 상대, 천룡문의 문주 천명자(天龍門主 天命者)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강호 백 년사에 손꼽히는 절대 고수이자, 이번 천황전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넓디넓은 비무대의 중앙에 섰을 때, 단우휘는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살갗을 꿰뚫는 듯했다. 그의 등 뒤에는 천하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어둠의 세력이 우승한다면, 무림은 영원히 피폐해질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이 전해졌다. 빛과 그림자의 싸움. 그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는 것이다.
“…흥, 오만하기 짝이 없군. 고작 무명 소졸이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천명자였다. 비무대 저편에 선 그는 마치 거대한 바위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회색 도포 자락이 미풍에 살짝 흔들릴 뿐, 그의 존재감은 고요하면서도 압도적이었다. 쩌렁쩌렁한 기세가 허공을 짓누르며 단우휘의 어깨를 짓눌렀다. 수련이 부족한 자라면 그 기세만으로도 무릎을 꿇을 만한 위압감이었다.
단우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트러짐 없는 천명자의 시선과 마주한 순간, 그의 굳은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문주께서는 어둠의 그림자에 물들었습니다. 천룡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 제가 막겠습니다.”
“건방진 소리! 어둠? 빛?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힘이다! 네놈의 하찮은 정의감 따위가 나의 길을 막을 순 없다.”
천명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내공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용이 잠에서 깨어나 날갯짓을 하는 듯, 비무대 전체가 싸늘한 기운에 휩싸였다. 모래먼지가 소용돌이치고, 관중들은 그 압도적인 기세에 숨을 죽였다.
쾅!
심판의 징이 울렸다.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굉음은 천둥처럼 비무대를 뒤흔들었다.
천명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마치 공간을 찢는 듯한 속도로 단우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육신은 푸른 섬광처럼 번뜩였고, 그가 내뻗는 주먹에서는 거대한 용의 포효가 들리는 듯했다.
“청룡출해(靑龍出海)!”
천명자의 필살 초식이었다. 푸른 기운을 두른 주먹이 거대한 해일처럼 단우휘를 덮쳤다. 정면으로 부딪쳤다가는 뼈조차 남지 않을 기세였다.
하지만 단우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틀며 공격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마치 거미줄처럼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천명자의 주먹을 감쌌다.
“만상지경(萬象之境).”
단우휘의 내공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힘을 흡수하고 역이용하는 유연함에 가까웠다. 천명자의 맹렬한 공격이 그의 손끝에 닿자마자, 거대한 파도가 암초에 부딪히듯 흩어지는 듯했다.
“호오? 제법이군.”
천명자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방어에 그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차가운 살기로 변했다.
“하지만 이런 잔재주로는 나의 ‘청룡’을 막을 수 없다!”
콰아앙!
천명자는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내공은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변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용이 그대로 단우휘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듯, 엄청난 기세로 내려찍었다.
“청룡쇄천(靑龍碎天)!”
하늘을 부수는 듯한 용의 일격. 비무대 전체가 흔들리고, 돌조각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단우휘는 이 거대한 압력 아래에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고, 팔다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피할 수 없어… 정면으로 막아내야 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내공은 천명자만큼 순수하고 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내공은 특이했다. 유연하게 흐르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우휘의 피부 아래에서 핏빛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몸을 덮은 얇은 비늘처럼, 붉은 빛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용린갑(龍鱗甲)…!”
천명자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방어막이 아니었다. 단우휘의 몸에 돋아난 붉은 비늘은 흡수하는 동시에 반격하는, 살아있는 갑옷과도 같았다.
거대한 청룡이 단우휘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붉은 섬광이 폭발했다.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비무대 위로 엄청난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연기 속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먼지 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단우휘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겨우 서 있었다. 그의 붉은 비늘은 갈라지고 찢겨 있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문주께서… 어둠에 물들지 않았다면, 이 초식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단우휘의 입가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천명자는 놀란 표정으로 단우휘를 응시했다. 그의 강력한 일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히 서 있는 상대는 단우휘가 처음이었다.
“네놈… 도대체 어떤 수련을 한 것이냐!”
천명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직감했다. 단우휘의 몸에서 피어나는 붉은 기운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공과 하나가 되어 역으로 상대를 집어삼키는, 살아있는 힘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입니다.”
단우휘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며, 마치 그의 전신을 뒤덮었던 비늘들이 살아있는 용의 비늘처럼 하나하나 빛을 내는 듯했다. 그의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천명자의 얼굴에 섬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이 젊은 무인이 감추고 있던 진정한 힘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찮은 발버둥일 뿐!”
천명자는 다시 한번 기세를 폭발시키며 돌진했다. 하지만 단우휘의 눈에는 이미 그 너머의 움직임이 읽히는 듯했다. 붉은 용의 비늘이 그의 몸을 감싸며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이번엔 단우휘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붉은 번개 같았다.
그리고 그의 주먹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붉은 기운이 폭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