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대지가 저무는 해를 삼키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은 마치 피처럼 번져갔고, 그 아래로 펼쳐진 거대한 도시 ‘엘드리아’는 암흑의 장막을 두른 듯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한때 영광스러운 빛의 도시라 불렸던 곳. 지금은 탐욕과 배신이 빚어낸 어둠의 심장이 되어 고동치는 폐허일 뿐이었다.
바람 한 줄기 없는 정적 속에서, 한 사내가 바위투성이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찢어진 검은 로브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흉터와 피로 얼룩진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한쪽 눈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남은 눈동자는 불타는 증오로 이글거렸다. 그의 이름은 카인. 한때는 정의를 수호하던 ‘새벽의 기사단’의 맹장이었으나, 지금은 복수라는 이름의 사슬에 묶인 그림자 괴물에 불과했다.
“엘드리아… 한때 내 심장이었던 곳.” 카인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포효 같았다. “이제는 네놈의 추악한 영혼이 서식하는 시궁창이 되었구나.”
그의 시선은 도시 중앙, 뾰족한 첨탑들이 꿰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암흑의 성채에 고정되었다. 저곳이 아벨의 거처였다. 한때 그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형제보다 더 가까웠던 존재. 하지만 그 우정은 뱀의 독처럼 카인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10년 전.
아벨은 새벽의 기사단 내에서 카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둘은 함께 전장을 누볐고, 함께 웃고 울었다. 카인은 아벨을 자신의 영혼의 반쪽이라 여겼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들의 유물’을 발견하던 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금지된 힘이 깃든 그 유물은 아벨의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질투를 끄집어냈다.
아벨은 카인을 배신했다. 유물의 힘을 독점하기 위해, 새벽의 기사단장인 카인을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위대한 성전의 마지막 전투에서, 카인이 적의 심장부에 고립된 순간, 아벨은 지원군을 철수시키고 카인을 죽음의 구덩이에 버렸다. 카인은 눈앞에서 자신의 기사단이 무참히 짓밟히고, 사랑하던 연인 아리엘이 아벨의 손에 희생되는 것을 봐야만 했다. 그의 육신은 갈기갈기 찢겼고, 영혼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 지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것은, 오직 아벨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카인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어둠의 심연을 헤매었다. 잊혀진 저주받은 땅에서, 그는 금지된 의식을 통해 죽음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몸은 그림자 속성을 띠게 되었고, 그의 칼날은 영혼을 베는 냉기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더 이상 기사 카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그림자 사냥꾼’ 카인이었다.
“아벨, 네놈은 내가 죽었으리라 생각했겠지.” 카인은 한 발짝, 한 발짝 엘드리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지옥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놈의 심장을 찢어 발기기 전에는 말이다.”
***
엘드리아의 거리는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아벨이 지배하는 성채는 오만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마법으로 강화된 것이었고,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눈이었다. 카인은 그림자 속을 유영하는 뱀처럼, 도시의 좁은 골목과 하수도를 이용해 성채로 접근했다. 지난 몇 달간 그는 아벨의 졸개들을 하나씩 처단하며 정보를 모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뿌렸다.
성채의 외벽은 난공불락처럼 보였지만, 카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 있었다. 그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거대한 벽을 마치 허공을 걷듯 올라갔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는 무심한 듯 성벽 위를 걷는 감시병의 목을 그림자 칼날로 베어버렸다. 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몸은 조용히 땅으로 떨어졌다.
성채 내부는 호화로웠지만, 그 화려함은 불길한 기운을 감추고 있었다. 벽에는 어둠의 유물들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죽은 영혼들의 피로 그려진 듯한 마법진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인은 한때 자신이 걸었던 복도들을 지나갔다. 그때는 이곳이 희망과 정의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배신의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길을 막아서는 아벨의 수하들은 그림자 칼날에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그들은 카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그의 그림자 마법에 갇혀 절규하다가 숨통이 끊어졌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아벨이었다.
마침내, 카인은 거대한 흑단 문 앞에 섰다. 이곳은 아벨의 알현실이자, 그가 금지된 유물의 힘을 이용해 백성들을 지배하는 심장부였다. 문 안에서는 거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인… 네놈이 드디어 여기에 도착했군.”
문은 스스로 열렸다. 안에는 한때 카인의 친구였던, 그러나 이제는 검은 갑옷과 어둠의 왕관을 쓴 ‘어둠의 제왕’ 아벨이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타락한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늘어서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섬뜩한 빛을 뿜어내는 ‘잃어버린 자들의 유물’이 놓여 있었다.
“네놈은 내가 죽었으리라 믿었겠지, 아벨.” 카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방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강력했다.
아벨은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음? 그딴 것은 약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네놈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고, 덕분에 이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이 위대한 엘드리아가 보이나? 네놈이 정의를 외치며 쌓아 올리려 했던 영광을, 내가 완벽하게 구현했지.”
아벨은 유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기운이 유물에서 뿜어져 나와 아벨의 몸을 감쌌다. 그의 눈은 붉게 빛났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어둠의 기운이 카인을 짓눌렀다.
“네놈은 그저 어리석은 정의감에 눈이 멀어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을 뿐. 카인. 내가 네놈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라. 그리고 여기서 죽어라. 10년 전처럼!”
아벨의 손짓에 주변 마법사들이 어둠의 주문을 외치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법 에너지의 파동이 카인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카인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가, 방의 다른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의 그림자 칼날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아벨의 경호병들을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피와 절규가 방 안을 채웠다.
“네놈의 기만은 여전하구나, 아벨.” 카인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힘? 네놈이 잃어버린 자들의 유물에서 빌려온 힘 따위가 진정한 힘이라 생각하느냐? 나는 네놈이 준 지옥에서, 네놈이 내게 심어준 증오 속에서, 나만의 힘을 길러 왔다.”
아벨은 카인의 달라진 모습에 당황한 듯했지만, 곧 비웃음을 되찾았다. “그래, 고작 증오 따위로? 하찮은 그림자 마법으로 이 유물의 힘을 넘어서려 하는가? 어리석군!”
아벨은 거대한 어둠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카인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검은 검은 마치 밤하늘의 조각처럼 어둠을 머금고 있었고, 그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했다. 카인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그림자 속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의 칼날은 아벨의 검과 부딪히며 섬뜩한 마찰음을 냈다.
두 남자의 격돌은 방 안의 모든 것을 부수었다. 벽에 걸린 유물들은 산산조각 났고, 흑단 옥좌는 갈라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고, 그들의 힘은 세상을 파괴할 듯했다.
“아리엘의 이름으로!” 카인이 절규하며 그림자 칼날을 아벨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다.
아벨은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여자 따위가 뭐 대수라고! 나는 이 세상을 다스릴 왕이다! 네놈의 하찮은 연인 따위가 내 야망에 방해가 될 수는 없다!”
그 말에 카인의 눈동자는 더욱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카인은 아벨의 검을 쳐내고, 아벨의 심장을 향해 그림자 칼날을 겨누었다. 아벨은 필사적으로 유물의 힘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형성하려 했지만, 카인의 분노가 담긴 칼날은 그 모든 것을 꿰뚫었다.
“이것이 네놈이 내게 가르쳐준… 진정한 복수의 맛이다.”
카인의 그림자 칼날이 아벨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벨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유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공허를 움켜쥘 뿐이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의 기운이 흩어졌고, 붉게 빛나던 그의 눈은 서서히 죽음의 빛을 잃어갔다.
“카… 인… 내가… 틀렸을 리… 없어…” 아벨은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카인을 향한 경멸과 후회가 뒤섞인 채로 굳어갔다.
카인은 칼날을 뽑아냈다. 아벨의 몸은 힘없이 옥좌에서 떨어져 나갔고, 거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오직 카인의 거친 숨소리만이 그 공간을 채웠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10년간 카인의 심장을 지탱했던 유일한 목적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희열도, 해방감도 없었다. 오직 깊은 공허와 그림자만이 남았다.
그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깨지고 부서진 유물들, 쓰러진 시체들, 그리고 피로 물든 바닥.
이 모든 것이 아벨의 탐욕이 빚어낸 파멸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카인, 그 자신 또한 그 파멸의 일부가 되었다.
창문 밖으로, 새벽이 오고 있었다. 희미한 푸른빛이 어둠에 잠긴 엘드리아를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인에게 그 빛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복수라는 어둠의 길을 걸어왔고, 그 끝에서 그는 그림자 그 자체가 되어버렸으니.
카인은 쓰러진 아벨의 시신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 텅 비어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그는 엘드리아의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운 새벽은 밝아왔으나, 도시를 지배하던 어둠은 또 다른 형태의 그림자를 낳았을 뿐이었다.
카인의 복수는 끝났지만, 그의 영혼은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비극의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또 하나의 영웅과 괴물을 동시에 잃었다. 아니, 한 괴물이 또 다른 괴물을 낳았을 뿐.
엘드리아에는 차가운 새벽 공기만이 맴돌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침묵 속에서,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파괴된 영혼의 메아리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비극적인 복수극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