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쟁패전
**1. 개막**
천하의 모든 기운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듯했다.
곤륜산맥의 최정상, 그마저도 인간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비경에 자리한 ‘무천각(武天閣)’. 본래는 삼천 년 전, 태고의 무신(武神)이 강림하여 천하의 기운을 다스렸다는 전설 속 장소였으나, 지금은 대지를 뒤덮는 거대한 결계와 함께 무림 고수들의 함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한 달 뒤면, 이곳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 ‘천하쟁패전(天下爭覇戰)’이 막을 올린다.
비류(飛流)는 수십 길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 펼쳐진 장관을 묵묵히 응시했다. 수많은 문파의 깃발이 오색찬란하게 나부꼈고, 그 아래로 명망 높은 고수들과 젊은 혈기가 넘치는 신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대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내공과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여, 이번에도 구경꾼 노릇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능글맞은 목소리에 비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나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빛바랜 도포를 걸친 남궁진(南宮震)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로 가득했지만, 그 깊이에는 천고의 세월을 담은 듯한 지혜가 서려 있었다.
“스승님, 이 지루한 구경을 벌써 몇 번째 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우승자는 정해져 있는 거 아니었나요?”
비류의 시선은 다시 아래를 향했다. 그의 시선 끝에 닿은 것은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비석이었다. 그 비석에는 붉은 글씨로 단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혼돈의 그림자가 대지를 덮으리니, 오직 천하를 통일할 패자만이 멸망을 막으리라.」*
몇 해 전부터 천하 각지에서 기이한 현상이 속출했다. 대지에 깊은 균열이 생기고, 그 안에서 기괴한 마물들이 솟아났으며, 하늘에는 핏빛 기운이 감돌았다. 무림맹과 정파, 사파, 마교까지 모든 세력이 이 이상 징후에 경악했지만,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천기성(天機星)의 예언자들이 고대 문헌에서 저 비석의 문구를 찾아냈고, 그것이 바로 ‘천하쟁패전’의 시작이었다.
승자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라, 모든 무림 세력을 통솔하며 다가오는 혼돈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것은 영광이 아닌,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막중한 책임이었다.
“정해져 있기는. 세상일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남궁진이 혀를 쯧쯧 차며 비류의 어깨를 툭 쳤다. “특히 이번엔 달라. 오랜 침묵을 깨고 나타난 괴물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네가 아는 그 뻔한 강자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야.”
비류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괴물이라뇨?”
“어허, 저기 보거라.” 남궁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무천각 동쪽 끝자락이었다. 다른 문파들이 저마다의 화려한 복장과 위풍당당한 기세로 위용을 뽐내는 와중에도, 그곳의 무인들은 검은 도포를 두른 채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마저 압도하는 듯한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어. 그들의 내공은 그 어떤 명문정파의 장로에게도 뒤지지 않을 테고, 그 기세는 마교의 고수들을 능가하는 듯 보이는군.”
“흥, 그래서요? 누가 오든 저곳의 고수를 이길 수는 없을 텐데요.” 비류의 시선은 무천각 중앙, 가장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한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그의 등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현재 무림맹의 실질적인 수장이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불리는, 현 무림맹주 ‘천뢰대협(天雷大俠)’이었다.
천뢰대협은 오 년 전, 마교의 거두들을 홀로 상대하며 그들의 준동을 막아냈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의 ‘천뢰신공(天雷神功)’은 단 한 번의 격발로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뒤집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궁진은 비류의 엉덩이를 툭 차며 놀렸다.
“야, 야. 이번엔 천뢰대협이 참가하는 게 아니잖냐. 그는 심판으로 온 것이지. 너무 큰바위 얼굴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네 코앞을 보거라.”
비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때, 정교하게 다듬어진 비석 위로 거대한 인영이 드리워졌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그 아래로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무림의 신성(新星), ‘흑룡검(黑龍劍)’이라 불리는 젊은 무인이었다. 마교의 잔존 세력을 궤멸시킨 공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에 아래에서 들끓던 무인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흑룡검이라. 저 자는 확실히 강하죠.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아 이미 일류 고수의 반열에 올랐으니.” 비류가 중얼거렸다.
“일류 고수? 흥, 이제 막 강호에 이름을 알렸을 뿐이다. 물론 저 정도 실력이면 십 년 안에 천하를 뒤흔들 재목임은 분명하겠지.” 남궁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번 천하쟁패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야. 혼돈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선 단순히 검술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할 걸세.”
그때였다.
하늘을 찢을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무천각 전체를 뒤흔들며 모든 무인의 심장을 울렸다.
천뢰대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무천각 전체를 휘감았고, 순식간에 모든 소란이 잠잠해졌다.
“강호의 모든 영웅들이여, 이 자리에 모인 것을 환영한다!”
천뢰대협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기이하게도 모든 이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명료하게 들려왔다. 그의 기운이 실린 목소리였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천하는 지금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륙을 덮치는 혼돈의 기운은 단순한 마교의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집어삼킬 태고의 재앙이다.”
무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비류 역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혼돈의 힘을 직접 마주한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재앙의 끔찍함은 이미 소문으로 파다했다.
“이에, 무림맹은 모든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까지… 천하의 모든 무림 세력의 동의하에 ‘천하쟁패전’을 개최한다!”
천뢰대협의 말이 끝나자, 무천각 아래에서 또다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대와 흥분,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인 함성이었다.
“이 대전의 승자는, 더 이상 단순히 한 문파의 수장이나 한 세력의 맹주가 아닐 것이다. 그는 천하의 무림을 통일하고, 혼돈에 맞서 싸울 대리인이 될 것이다!”
천뢰대협은 비석을 등지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모든 참가자들을 훑었다. 마치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기운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대결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너희의 적은 서로가 아니다. 진정한 적은 우리를 삼키려 드는 저 혼돈의 그림자다. 그러니, 이 대결에서 너희의 모든 것을 보여주되, 명예를 잃지 마라!”
비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 메아리쳤다.
*「강호에 발을 들였으면, 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역사가 되도록 살아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거라.」*
비류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지루함이나 냉소가 없었다. 대신, 깊은 투지와 알 수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지루한 구경꾼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그의 발걸음이 무천각 아래를 향했다. 수많은 군중 속으로,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어.
이제 막, 천하의 운명을 건 거대한 서막이 올랐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