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아니, 세상은 언제부턴가 거대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높이 솟았던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거리에는 검게 타거나 녹슨 차량들이 마치 거대한 곤충들의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상징들 사이를, 이제는 ‘것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배회했다. 녀석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갈망하는 끔찍한 괴물들이었다.
지훈은 낡고 녹슨 철제 셔터 아래로 몸을 숙여 겨우 비집고 들어갔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이제는 익숙한 냄새였다. 뒤따라 들어온 유진은 낡은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위를 밝혔다. 희미한 불꽃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지독한 농담처럼 흔들렸다.
“또 빈털터리 아니겠지?” 유진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지쳐 있었다. 지난 며칠간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물은 바싹 말라 있었다.
“어딘가에는… 뭔가 있겠지.” 지훈은 대답했지만,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이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한때 대형 서점이었던 모양이었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바닥에 뒹구는 찢어진 책들이 과거의 영광을 초라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지식도, 예술도 아니었다. 그저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썩지 않은 통조림 하나,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한 모금, 혹은 ‘것들’에게서 자신들을 지켜줄 최소한의 무기라도 좋았다.
“이곳도 이미 한 번 휩쓸고 간 것 같네.” 유진이 책꽂이 사이를 헤치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라이터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니면 애초에 사람들이 이런 곳까지는 안 왔거나.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
“그럴 수도.” 지훈은 찢겨나간 벽지 사이로 드러난 콘크리트 벽을 훑어보았다. 무너져 내린 천장 때문에 건물 자체가 위태로웠다. 자칫하면 자신들이 이 안에 갇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유진이 멈칫했다. “잠깐만, 지훈아. 저기 봐.”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서점의 가장 안쪽, 무너진 벽 너머였다. 원래는 창고나 직원 통로였을 법한 곳이었는데, 그 너머로 어둠에 잠긴 공간이 어렴풋이 보였다. 특이한 건 그곳만은 건물 잔해나 부서진 집기들로 막혀 있지 않고, 비교적 온전히 보존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다.
“저긴 뭐야?” 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점 창고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도, 그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었다. 유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아직 아무도 못 들어간 곳 아닐까?” 그녀의 목소리에 희망과 함께 미미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미지의 공간은 항상 위험을 동반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곳에는 귀한 것이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지훈은 한동안 망설였다. 본능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이 그를 그곳으로 향하게 했다. 결국 그는 낡은 칼자루를 고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자. 어차피 이대로 죽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그들은 조심스럽게 무너진 벽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서점의 한 부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작고 둥근 방이었는데, 벽은 오래된 돌로 마감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먼지는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 주기적으로 청소라도 한 듯, 바깥의 폐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낮은 돌제단 위에 하나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책이었다.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대의 책이었다. 가죽으로 엮은 듯한 표지는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고, 그 위에는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마치 방금 인쇄라도 한 듯 선명했다. 그리고 유진이 아까 느꼈던 희미한 빛은 바로 이 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깜빡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유진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으로 동시에 흔들렸다.
지훈은 책에 홀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 책은 평범한 책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책의 표면을 만졌다.
그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다. 눈앞이 번쩍하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뇌리에는 수많은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들이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그것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해서 마치 그가 고대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숨겨진 힘… 고대의 계약… 깨어날 자…’
정신을 차렸을 때, 지훈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몸은 후들거렸지만, 묘한 감각이 전신을 감돌았다.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이었다. 그의 손에 닿았던 책은 더 이상 희미한 빛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빛이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든 듯했다.
“지훈아! 괜찮아? 뭐 하는 거야?”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지훈을 붙잡았다.
지훈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그때였다. 귓가에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것들’의 울음소리였다.
*크아아악!*
그들의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것들’이 이 폐허 건물 주변으로 몰려오는 소리였다. 지훈이 책을 만진 순간 퍼져나간 알 수 없는 힘이 ‘것들’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젠장! 몰려와! 당장 도망쳐야 해!” 유진이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동시에 그의 심장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야가 달라졌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공간 사이사이에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귓가에 끊임없이 고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힘을 믿어라… 깨어난 자여…’
밖에서는 쿵,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것들’이 문을 부수려는 듯 벽과 문을 들이받는 소리였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책이 있던 제단을 돌아보았다. 책은 사라진 듯했지만, 그의 손바닥에는 검은색 상형문자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책의 표지가 그의 피부로 옮겨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제단의 돌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제단 위의 돌멩이 하나를 띄워 올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돌멩이는 마치 지훈의 의지에 반응이라도 하듯,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중에 떠오른 돌멩이와 지훈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며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콰아앙!*
바깥 문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것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훈은 공중에 떠오른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 힘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부서진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에 반응하듯, 공중에 떠오른 돌멩이가 마치 발사된 탄환처럼 빠른 속도로 문을 향해 날아갔다.
*크아아악!*
문밖에서 ‘것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비명이었다. 지훈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고대의 마법이었다. 이제, 이 알 수 없는 힘과 함께, 그들의 생존을 건 싸움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과연, 이 힘은 그들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저주일까.
지훈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직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한 줄기 새로운 희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