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 강철 문 뒤의 비명

회색빛으로 물든 도시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잿빛 하늘 아래, 유리 파편처럼 반짝이는 빌딩 숲은 생명력을 잃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냈다. 저 멀리, 한때 번화했던 도심의 중심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만이 이곳이 여전히 살아있는 지옥임을 상기시켰다.

우리가 피난처로 삼은 Y빌딩은 그런 지옥 한가운데서 마치 섬처럼 고립된 성역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업무용 빌딩이었지만, 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생존자들의 피와 땀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1층부터 5층까지는 두꺼운 철판과 폐차 잔해로 막혔고, 창문들은 모두 철조망과 강철 방탄유리로 이중 삼중으로 봉쇄되었다. 입구는 지문 인식과 안면 인식, 그리고 철제 도어에 이어진 수동 잠금장치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화되었다.

강무혁은 이곳의 ‘사서’였다. 한때는 촉망받는 범죄심리학 교수였다던가, 아니면 특수 수사대 소속 프로파일러였다던가 하는 소문만 무성했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눈빛은 언제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혁은 8층의 임시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낡은 철학서를 읽고 있었다. 책장은 찢겨진 종이와 낙서로 가득했고, 표지는 곰팡이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책장 너머로 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렸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은 이곳이 안전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지만, 무혁은 그 덧없는 평화의 그림자 속에서 언제나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려 애썼다.

바로 그때였다.

“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건물 전체를 흔드는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웅장한 사이렌 소리는 고요했던 빌딩의 모든 생존자를 단숨에 깨웠다. 무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그는 읽던 책을 덮지도 않고 그대로 의자 옆에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서부터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경비대원들이 총을 움켜쥔 채 비상구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빠르게 번졌다.

“무슨 일이야?”
“박 팀장 방에서 비명 소리가 났대!”
“박 팀장 방? 거긴 외부인이 들어갈 수도 없잖아!”

박 팀장. 본명 박영진. 그는 Y빌딩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이곳의 모든 전기 및 보안 시스템을 총괄하며, 생존자들의 목숨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 관리까지 담당했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깔끔하고 완벽주의자였으며,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그의 개인 방은 Y빌딩에서도 가장 보안이 삼엄한 곳이었다.

무혁이 비상구로 향하자, 김 반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김 반장은 과거 군인이었다는 소문처럼, 단단하고 굳건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혼란이 역력했다.

“강 사서!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김 반장이 무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할 말이라면, 박 팀장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다는 겁니다, 김 반장님.” 무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김 반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박 팀장이… 살해당한 것 같아. 그의 방에서 말이지.”
“살해?” 무혁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곳은 외부 침입이 불가능한 곳 아니었습니까?”
“그렇네. 그래서 더 미치겠는 거야.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무거운 철제 캐비닛으로 굳게 막혀 있었어. 창문은 죄다 용접으로 봉쇄되어 있고, 환기구는 사람 한 명 지나갈 크기도 못 돼. 밀실이야. 완벽한 밀실!”

김 반장은 무혁이 평소에 이런 사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무혁의 기이한 통찰력에 기댄 적이 몇 번 있었다. 비록 그가 늘 어딘가 차분하고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안으로 안내해주시죠.” 무혁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박 팀장의 방은 Y빌딩 12층, 가장 안쪽에 위치한 개인 주거 공간이었다. 문은 이미 강제로 열려 있었다. 두꺼운 강철 문은 부서지고 찌그러져 있었고, 문 안쪽에는 육중한 철제 캐비닛이 쓰러져 있었다.

방 안은 겉보기에는 깔끔했지만, 중앙에는 박 팀장의 시신이 엎드려 있었다. 등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힌 날카로운 흉터가 선명했다. 방바닥은 흥건하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문을 강제로 열었을 때, 캐비닛이 쓰러져 있었네. 누가 안에서 문을 막았던 거야.” 김 반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무혁은 김 반장의 설명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방 전체를 천천히 훑었다.
방 안은 박 팀장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듯 정갈했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 하나 없었다. 그의 작업 책상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위에 놓인 태블릿 PC는 잠금 해제된 상태였다.

무혁은 시신에 다가갔다. 박 팀장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가락은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듯 경직되어 있었지만,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오른쪽 손등에는 미세한 긁힌 자국과 함께 옅은 회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너무나 미세해서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든 흔적이었다.

그리고 바닥.
“이봐, 강 사서! 뭘 그렇게 자세히 보는 건가?” 김 반장이 초조하게 물었다.
무혁은 대답 없이 몸을 숙여 문턱 근처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주 작고 희미한 흠집이 문 안쪽, 캐비닛이 밀려 있던 자리 부근에 나 있었다. 그 흠집 주변에는 방의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반짝이는 미세한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아주 단단한 무언가가 바닥을 긁고 지나간 흔적 같았다.

“창문과 환기구는 완벽하게 막혀 있습니까?” 무혁이 물었다.
“그럼! 우리가 얼마나 꼼꼼히 봉쇄했는데! 애초에 창문은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구조고, 환기구는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들어간다니까.” 김 반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외부 침입은 불가능하다는 말이군요. 그럼, 범인은 이곳에 계속 있었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김 반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럼 박 팀장은 자해라도 했다는 말인가?”
“자살이라면 왜 굳이 캐비닛으로 문을 막고, 자신을 등 뒤에서 찔렀을까요. 저 흉터는 스스로 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무혁은 시신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저건 외부의 공격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여인이 울먹이며 다가왔다. 조수정 씨였다. 그녀는 박 팀장의 비서였다.
“팀장님… 팀장님!” 그녀는 주저앉아 흐느꼈다.
“진정하세요, 조수정 씨.” 김 반장이 말했다. “박 팀장님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당신이었죠?”
조수정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저녁 식사 배급 전에 마지막 보고를 드렸어요. 팀장님은 항상 식사 전에 문을 잠그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시는 습관이 있으셨거든요.”
“문을 잠그는 습관이요?” 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특히 식사 시간 전에는 더 그러셨어요. 외부인 출입을 극도로 꺼려 하셨거든요. 항상 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문을 잠그고, 그다음 캐비닛을 밀어서 한 번 더 막으셨어요.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서요.”

무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한 시간 후, 무혁은 경비대원들과 김 반장, 그리고 조수정 씨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모았다.
“범인은 박 팀장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무혁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말도 안 돼! 그럼 대체 누가 박 팀장을 죽였단 말인가!” 김 반장이 소리쳤다.
무혁은 김 반장의 말을 끊고 계속했다.
“김 반장님, 아까 박 팀장님이 ‘안에서’ 문을 막았다고 하셨죠. 그리고 조수정 씨, 박 팀장님의 습관이 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문을 잠그고 캐비닛을 미는 것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밀실 살인의 전부를 설명해 줍니다.”

무혁은 바닥의 흠집과 미세한 파편을 가리켰다.
“이 흔적은 범인이 사용한 흉기의 흔적입니다. 흉기는 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좁은 공간을 통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도구였습니다.”
그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박 팀장님은 평소 습관대로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그고, 캐비닛을 밀어 막으려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범인은 문 아래의 작은 틈새를 이용했습니다. 이 문은 아래쪽에 아주 미세한 틈이 있습니다. 박 팀장님은 늘 그 틈마저 막아두려고 애썼지만, 완벽하지는 못했죠.”

모두의 시선이 문 아래 틈새로 향했다. 정말로 캐비닛이 밀려 있어도 종이 한 장 정도 들어갈 만한 아주 미세한 틈이 존재했다.

“범인은 이 틈을 통해 길고 얇은, 하지만 단단한 무언가를 밀어 넣었습니다. 아마도 재활용된 철근이나 탄소섬유 막대 같은 것이었겠죠. 그리고 그 끝에는 날카롭게 가공된 칼날이 달려 있었을 겁니다. 박 팀장님은 캐비닛을 밀고 막 잠금장치를 확인하려던 순간, 등 뒤에서 기습당한 겁니다. 방어할 틈도 없이 정확히 심장을 찔렸죠.”

무혁은 박 팀장의 시신으로 다가가 그의 손등에 묻어 있던 미세한 회색 가루를 가리켰다.
“이 가루는 범인이 사용한 무기의 파편입니다. 박 팀장님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을 찌른 무언가를 잡으려 했고, 그때 이 파편이 묻은 겁니다. 범인은 박 팀장님이 완전히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흉기를 다시 밖으로 빼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박 팀장님이 문을 잠그고 캐비닛을 미는 동안 이루어졌기에, 아무도 범인이 침입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침묵이 흘렀다. 김 반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런… 그런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고?”
“네. 그리고 범인은 박 팀장의 지독한 편집증과 습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혁은 조수정 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수정 씨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공포와 경악으로 흔들렸다.
“조수정 씨. 당신은 박 팀장님의 모든 습관을 알고 있었겠죠. 식사 시간 전에 문을 잠그고, 캐비닛을 밀어 막는 것까지. 그리고 당신은 박 팀장님의 비서로서, 이곳 Y빌딩의 모든 구조와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이 문의 미세한 틈까지요.”
무혁은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박 팀장님은 최근 무엇에 대해 염려하셨습니까, 조수정 씨? 당신은 그가 태블릿 PC를 잠금 해제한 상태로 남겨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은 그가 항상 중요 정보는 태블릿에 기록해 둔다는 것을 알았겠죠. 그 태블릿에는 어떤 정보가 있었습니까? 당신이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될 만한 정보가요.”

조수정 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아니에요! 저는… 저는 아니에요!”
“박 팀장님은 며칠 전부터 당신이 자원 배급 현황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더군요. 당신은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 팀장님의 방에 숨어 들어가 그를 살해할 수는 없으니, 이런 잔인하고 기묘한 방법으로 그를 제거한 겁니다. 박 팀장님이 태블릿에 기록해둔 모든 것을 지우고, 당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무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수정 씨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김 반장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잡아! 이 년이 감히!” 김 반장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조수정 씨는 끌려가면서도 발버둥 쳤지만, 그녀의 저항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녀가 끌려나간 뒤, 방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밀실 살인의 수수께끼가 풀리자,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허무감이었다.

무혁은 다시 박 팀장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생존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아이러니한 죽음이군요. 지옥 속에서 스스로 만든 성역은 결국 인간의 탐욕 앞에서는 무력한가 봅니다.”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잿빛 도시가 펼쳐져 있었고,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만들어낸 이 작은 사회는, 저 바깥의 짐승들만큼이나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강무혁은 그 위험 속에서 또 다른 진실을 찾아 헤맬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