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미스터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잊힌 시간의 잔영

## 제1화. 정적 속의 균열

김민준은 익숙한 곰팡이 냄새 속에서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오래된 종이와 퀴퀴한 나무의 뒤섞인 향은 그에게 평온함보다 기시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는 먼지 쌓인 서가 사이를 오가며 교수님의 끝없는 목록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이 고택의 지하 서고는 거대한 미로와 같았다. 수백 년 전의 서책부터 이름 모를 고대 유물까지, 이 박물관급 개인 소장품 속에서 민준은 지난 3년간 잊힌 시간의 조각들을 맞춰왔다.

“이게 대체… 어디에 있던 거지?”

민준의 손끝이 닿은 곳은 일반적인 서책들이 꽂혀 있는 낡은 칸이 아니었다.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유물 보관함들 중,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박혀 있던 정체불명의 상자. 겉면은 칠이 벗겨진 나무였고, 뚜껑에는 묵직한 황동 잠금쇠가 박혀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민준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어 올렸다. 예상보다 가벼운 무게에 의아해하며 잠금쇠를 당기자, 뻑뻑한 소리와 함께 낡은 자물쇠가 열렸다.

상자 안에는…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책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했다. 얇고 단단한 가죽으로 싸인 그것은 어떤 제본의 흔적도 없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검게 바랜 가죽 위로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제목은커녕 저자의 이름도, 출판사 정보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 이질적인 형상이었다.

“교수님은… 이런 걸 왜 말씀 안 해주셨지?”

민준은 책을 꺼내들었다. 차가웠다. 마치 금속 덩어리를 쥔 듯한 싸늘한 감촉이 장갑 위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책의 앞면을 살펴보았다. 표면을 따라 흐르는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잡한 기호들의 조합이자, 어떤 언어의 조각인 양 섬세하게 이어져 있었다. 본 적 없는 문양들이었다. 그는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수없이 섭렵했지만, 이런 형태의 기호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책의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을 훑자, 얇고 날카로운 금속 조각이 돌출되어 있었다. 그 조각을 살짝 밀어 올리자, 놀랍게도 틈이 벌어졌다. 마치 정교한 퍼즐 조각처럼 맞물려 있던 가죽 표면이 스르륵 열리는 순간, 서고를 감싸고 있던 정적이 일순간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쉬익-

아주 미세한 바람 소리. 지하 서고에서는 들릴 리 없는 소리였다. 동시에, 민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페이지. 일반적인 종이 페이지가 아니었다. 얇고 투명한, 그러나 단단한 재질의 조각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표지의 문양과 같은 기호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기호들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맥박 치는 빛을 품고 있었다.

민준은 홀린 듯 가장 앞 페이지에 새겨진 가장 크고 복잡한 기호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싸늘한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눈앞의 시야가 기이하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서고의 낡은 서가들이 일그러지고, 책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퀴퀴한 먼지 냄새 대신, 비릿하면서도 신성한, 알 수 없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소리.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저 먼 심연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듯한, 수천 개의 목소리가 뒤섞인 웅얼거림. 그것은 언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단순한 소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 웅얼거림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한 슬픔과, 동시에 무한한 희열이 뒤섞여 느껴졌다.

민준은 손가락을 떼어내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기호에 단단히 붙잡힌 것처럼,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각이 낯선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눈꺼풀 안쪽으로 번개처럼 섬광이 터졌고, 그의 뇌리에 거대한 환영이 각인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석조 구조물.
그 위에 새겨진, 자신이 보고 있는 책의 문양과 똑같은 기호들.
그리고… 구조물 앞에서 무릎 꿇은 수많은 인영들.
그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이 대지를 감싸 안았다.
거대한 힘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 느껴졌다.
수많은 인영들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민준 군! 거기 있나?”

천둥 같은 교수님의 목소리가 민준의 귓가를 강타했다. 환영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손가락을 떼어냈다. 차가웠던 책은 다시금 아무런 반응도 없는 평범한 ‘물건’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 교수님!” 민준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쪽 깊은 곳까지 내려왔군. 찾으려던 고문헌은 아니었나?” 이 교수는 돋보기를 코에 걸친 채 서고 한켠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낡은 작업복은 먼지로 덮여 있었다.

“아, 그게… 우연히 특이한 걸 발견해서요. 제목이 없는 책인데…” 민준은 말을 얼버무렸다. 방금 그 경험은 너무나 생생했고, 동시에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목 없는 책이라… 음.” 이 교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민준의 손을 훑었다. 민준은 순간 움찔하며 책을 등 뒤로 감추었다. 마치 훔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오래된 상자 안에 있었는데, 이런 형식은 처음 봅니다.”

“흐음… 그래? 자네가 흥미를 느낄 만한 것이라면 꽤나 귀한 것이겠군. 하지만 일단 지금은 저쪽에 있는 도자기 파편들을 좀 분류해 주게. 어제 새로 도착한 것들이라네.” 이 교수는 손짓으로 민준이 서 있던 서가 옆쪽 벽면을 가리켰다.

“네, 알겠습니다.” 민준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책을 다시 상자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책은 상자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마지못해 꾸역꾸역 집어넣자, 상자의 뚜껑이 아슬아슬하게 닫혔다.

이 교수가 서고를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민준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북을 치는 듯 뛰고 있었다. 그는 상자를 다시 원래 있던 벽면의 은밀한 틈새에 숨겨 넣었다. 그리고 도자기 파편이 놓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이 덜덜 떨렸다. 뇌리에는 황량한 대지와 거대한 석조 구조물, 그리고 무릎 꿇은 인영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환영이라기엔 너무나 강렬했다.

도자기 파편들을 정리하면서도 민준의 신경은 온통 등 뒤에 숨겨진 상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책은… 분명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창밖에서 섬뜩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지하 서고는 창문이 없다.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환기창은 천장 근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겨우 나 있었다.
그곳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길고,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형상.
마치… 어둠 그 자체처럼.

민준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쥔 책이 단순한 ‘발견’이 아님을,
이미 어떤 거대한 존재의 ‘표적’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쉬익…*

다시 한번, 그 미세한 바람 소리가 서고를 맴돌았다.
아니, 이번에는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뒤를 응시하고 있다는 섬뜩한 기척.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서가, 그 깊은 곳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책의 힘에 이끌려 온 것처럼.

그리고 민준은 확신했다.
그 책은, 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할 열쇠였다.
세상이 감춰온, 고대의 거대한 마법의 힘.
그리고 그 힘을 둘러싼, 끝없는 추격과 위험의 시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