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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빛 잔해 속 마지막 숨결 (13화)

강철과 콘크리트의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난 잿빛 도시. 그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야 할 백화점 건물은 이제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을씨년스러운 침묵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윤슬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부서진 쇼윈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가로막았다. 진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얕은 숨소리에 의지해 앞을 나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알 수 없는 금속성 악취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저기, 오빠.”

윤슬의 목소리가 찢겨진 천막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진우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시선은 한때 화려한 옷가지들을 전시했을 마네킹의 부서진 팔에 머물러 있었다. 껍데기만 남은 플라스틱 인형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채, 마치 마지막 순간의 비명을 그대로 박제해 놓은 듯했다.

“괜찮아.” 진우는 짧게 대답하며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췄다. “흔한 풍경이잖아.”

하지만 그 흔한 풍경이 주는 공포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밟히는 유리 파편, 뒤틀린 철골 구조물, 그리고 정체 모를 얼룩들. 이 모든 것들이 한때 생기로 가득했던 공간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웅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식량과 물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며칠 전 발견한 오래된 지도가 이 백화점의 지하 창고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뭔가 있어.”

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는 한때 진열대였을 법한 거대한 덩어리 뒤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한 흔적이 선명했다. 녹슨 철제 선반을 끌어다 세운 임시 바리케이드. 분명 누군가가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거나, 혹은 뭔가를 숨겨두었다는 증거였다. 진우는 윤슬에게 등 뒤에 바싹 붙어 있으라는 손짓을 한 뒤, 조심스럽게 바리케이드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이 드러났다. 낡은 담요 더미,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마시다 만 캔 음료수. 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위험이자 동시에 희망이었다. 다른 생존자가 있다면 정보를 얻을 수도, 심지어는 동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언제나 위협이었다. 척박한 세상에서 타인은 곧 경쟁자이자, 약탈자였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진우가 속삭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담요를 걷어냈다. 눅눅한 냄새와 함께 바닥에 흩뿌려진 몇 개의 낡은 통조림 캔이 보였다. 모두 내용물이 비워진 채였다.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이내 진우의 눈은 통조림 캔 옆에 놓인 작은 가죽 주머니에 꽂혔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낡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가죽이었다.

“이건…” 진우가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예상보다 묵직했다. 조심스럽게 끈을 풀자, 안에서 작은 유리병 몇 개와 함께 낡은 종이 뭉치가 쏟아져 나왔다. 유리병 안에는 정체 모를 약초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종이 뭉치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단순한 일기가 아닌, 뭔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듯했다.

“약초인가 봐. 그리고 이건… 지도?” 윤슬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새로운 지도가 있는 건가?”

바로 그때였다.

*쿵*.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충격음. 분명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더욱 낮고, 섬뜩한… 마치 거대한 짐승의 발소리 같은 소리였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움켜쥐고 윤슬의 손을 잡았다. “튀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가깝고, 빠르고, 명확했다. 질질 끌리는 듯한 발소리, 그리고 무엇인가를 긁는 듯한 섬뜩한 마찰음. 마치 칼날이 거친 벽을 긁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윤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빠… 저거… 저게 뭔데?”

진우는 대답할 틈도 없이 윤슬을 잡아끌었다. 그들이 숨어 있던 바리케이드 뒤편에서, 어둠 속 그림자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거대한 형체가 불분명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뼈와 가죽만 남은 거대한 망령이 뒤틀린 채 기어 나오는 듯한 모습.

그것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느릿하게 기어오는 듯했지만, 한 번 발을 디딜 때마다 거리가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찢겨진 천장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잠시 그 형체를 비췄다. 축 늘어진 피부, 앙상하게 드러난 척추, 그리고… 진우의 눈은 그 형체의 머리 부분에 돋아나 있는, 뾰족하고 거친 뿔 같은 것에 박혔다.

“이쪽이야!” 진우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외치며, 텅 빈 진열장을 넘어 뛰었다. 윤슬도 그 뒤를 필사적으로 따랐다. 발밑에서 유리 파편이 쨍그랑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뒤에서는 섬뜩한 마찰음이 점점 더 커졌다. 그것이 그들을 쫓고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어둡고 복잡한 백화점의 미로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한때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했을 코너를 지나, 에스컬레이터 잔해를 뛰어넘고, 무너진 천장 파편을 간신히 피했다.

“더 이상 못… 오빠, 더 이상은…!”

윤슬의 목소리가 헐떡거림에 묻혔다. 그녀는 이제 거의 끌려오다시피 진우를 따라오고 있었다. 진우 역시 폐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죽음이었다. 그들이 조금 전 봤던 그 끔찍한 형체는 분명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죽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혹은 되살아난… 무언가였다.

진우의 눈에 희미하게 열린 비상구 문이 들어왔다. 저 문만 통과하면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윤슬을 이끌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문을 향해 달렸다.

*콰앙!*

바로 그때, 뒤편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방금 지나온 구역의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먼지와 잔해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길게 드리워졌다. 그것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그들의 탈출로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진우는 급히 몸을 틀어 다른 방향을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향한 곳 역시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 더미로 막혀 있었다. 사방이 막혔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진우는 윤슬을 등 뒤로 숨긴 채, 낡은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만, 놓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심연에서 솟아난 악몽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뼈만 남은 팔, 그리고 마치 송곳니처럼 날카롭게 튀어나온 턱. 그것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겨운 악취가 진우의 코를 마비시키는 듯했다.

“도망쳐, 윤슬.” 진우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든….”

하지만 윤슬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은 듯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괴물은, 마치 세상의 모든 절망을 응축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그 찢어진 입에서 끔찍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비명도, 울부짖음도 아니었다. 마치 수천 개의 뼈가 동시에 부서지는 듯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고 있는 듯한… 절규였다.

진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파이프를 고쳐 잡았지만, 이미 몸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 흩어진 잔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빛을 반사하며 이쪽으로 굴러왔다. 그것은 조금 전 진우가 발견했던, 낡은 가죽 주머니였다. 그 안에서 작은 종이 뭉치가 튀어나와, 괴물의 발밑에 떨어졌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종이 위로,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섬뜩하게 흔들렸다.

*마지막… 생존… 경고….*

그리고 괴물의 그림자가 그들 위로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