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익숙한 균열, 낯선 속삭임**
“젠장, 오늘도 F급이냐. 대체 언제쯤 C급 던전이라도 밟아볼까.”
강민준은 낡은 방패를 어깨에 멘 채 투덜거렸다. 스크래치 투성이의 금속 방패는 그의 오랜 고뇌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 고뇌란, 던전 탐사 경력 7년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F급 던전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자신의 처지였다. 닳고 닳은 가죽 장갑 사이로 드러난 그의 손은 투박했지만, 그 어떤 던전의 진흙탕 속에서도 살아남은 강인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날카로운 활시위를 조율하던 유진이 툭 던지듯 말했다. 길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찰랑였다. “C급 던전? 그러다 목 날아가는 수가 있어요. 우리는 F급에 딱 어울리는 능력치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장난기와 함께 현실적인 경고가 담겨 있었다.
“능력치가 어울리는 게 아니라… 능력을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없는 거다, 유진아.”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 지겨운 레퍼토리. 매일 똑같은 던전 입구, 똑같은 몬스터, 똑같은 대화. 재능이 없다고 하기엔 아쉬운 감각과 경험, 그렇다고 특별하다고 하기엔 한참 부족한 마력량. 딱 그 중간 어디쯤에서 그는 지난 몇 년을 허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버려진 광산 제3구역’. 이름만 들어도 지겨운 이 던전은 F급 탐사자들의 단골 사냥터였다. 초록색 고블린과 느릿한 슬라임, 가끔 나타나는 독거미가 전부인 곳. 얻어지는 마정석과 몬스터 부산물도 푼돈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준과 유진은 이 푼돈이라도 벌어야 했다. 장비 유지비, 식비, 그리고 저물어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이라도 놓지 않기 위해서.
“자, 그럼 오늘의 희망 탐사를 시작해볼까?” 민준이 한숨과 함께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차갑고 습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벽을 따라 자라난 붉은 이끼와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익숙하다 못해 불쾌한 향연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희미한 시야를 잡아낼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그들은 전방을 향해 횃불을 켜 들었다.
“왼쪽은 고블린 동굴, 오른쪽은 슬라임 늪이에요. 오늘은 슬라임 늪부터 돌죠? 광물 채취도 해야 하니.” 유진이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뛰어난 보조이자 후방 딜러였다. 활 실력은 둘째치고, 던전 지형 분석이나 몬스터 패턴 파악은 민준보다 한 수 위였다.
“그래, 그러자. 빨리 끝내고 나가자.” 민준의 목소리에는 이미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들은 능숙하게 슬라임 늪으로 향했다. 발아래 진득하게 달라붙는 점액질을 피하며, 그들은 끈적이는 녹색 슬라임들을 하나둘씩 처치해나갔다. 민준이 묵직한 방패로 길을 막고 슬라임의 공격을 유도하면, 유진이 날렵하게 활을 쏴 핵을 파괴하는 방식. 수백 번도 더 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한 합을 자랑했다.
“크, 끈적이는군.” 민준이 칼날에 묻은 슬라임 점액을 대충 닦아냈다. 이따위 하찮은 슬라임에게도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곳이 던전이었다.
어느덧 슬라임 늪의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였다. 더 이상 슬라임의 끈적거리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완전히 탐사 완료된 구역이었다. 유진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횃불이 비추는 벽면 어딘가를 응시했다.
“잠깐만요, 오빠.”
“왜? 광물이라도 찾았냐?” 민준이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곳에서 귀한 광물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던지는 습관적인 질문이었다.
“아니요, 이상한데요.”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이쪽은 탐사 완료 지역인데, 뭔가… 기운이 달라요.”
민준도 주위를 둘러봤다. 붉은 이끼가 뒤덮인 바위벽과 진득한 흙바닥.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무슨 소리야? 매번 오던 길인데. 착각이겠지.”
“아니요. 제 마력 감지 능력이 뭔가 심상치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주 희미하지만, 이곳 바위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이에요. 지금까지 이 던전에서 느껴본 적 없는.” 유진은 자신의 손을 벽에 대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의 마력 감지 능력은 거의 타고난 수준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희미한 마력의 잔흔 정도만 느끼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언가 그녀의 감각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민준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유진이 이렇게 확신할 때는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버려진 광산 제3구역’에 미탐사 지역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7년 전, 이 던전이 처음 열렸을 때부터 수많은 탐사자들이 샅샅이 뒤진 곳이었다.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이 발견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이쪽이에요.” 유진이 손을 뗀 후, 민준의 왼쪽 벽을 가리켰다. 다른 벽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바위벽이었다. 이끼조차도 다른 곳보다 덜 붙어 있을 정도로 흔한 벽이었다.
“여기?” 민준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손을 대 보았다. 차갑고 거친 질감. 특별할 것 없었다.
“괜히 헛고생하는 거 아니냐? 괜히 힘 빼지 말고 얼른 돌아가자. 오늘 할당량은 채웠잖아.”
“아니에요, 오빠! 확실히… 저 안쪽에 뭔가 있어요. 아주 오래되고, 강력한….” 유진의 목소리에 일말의 흥분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던전 탐사에 있어서는 항상 침착하고 이성적이었기에, 이 정도의 반응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가득했다.
민준은 유진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평소의 피곤함 대신, 묘한 기대감과 확신이 서려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갇혀 있던 그에게, 유진의 눈빛은 작은 불씨를 던지는 듯했다.
“좋아. 한번 해보지, 뭐. 대신 아무것도 안 나오면 오늘 저녁은 네가 쏜다.”
그는 낡은 방패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꽉 쥔 채 허리춤에 찬 낡은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벽을 향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쾅! 둔탁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바위벽에서는 먼지만 조금 일어날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봐, 유진. 아무래도 네 감이 틀린 것 같다.” 민준은 팔이 저릿한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요, 더 강하게! 이질적인 마력이 이 벽에 흡수되고 있어요. 아마 마법적인 보호막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유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였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팔에 희미한 마력이 깃들었다. F급 탐사자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근력 강화 마법. 그는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마력을 검에 집중시켰다.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고, 검 끝에서 희미한 백색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쿵! 쿵! 쿵! 몇 번의 강렬한 타격이 이어졌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금이 바위벽을 따라 번져나갔다. 균열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거대한 거미줄처럼 벽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앙-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돌무더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민준과 유진은 기침을 하며 무너진 벽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은 예상했던 일반적인 던전 통로와는 전혀 달랐다.
벽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었고, 천장과 바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공기는 바깥 던전의 축축함 대신, 건조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래된 박물관의 밀폐된 공간 같은 느낌이랄까. 마치 수천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곳처럼, 시간의 흐름마저 멈춰버린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벽면을 따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 같기도 하고, 번개 같기도 한 기묘한 문양들이 푸른빛을 희미하게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부드럽고 은은하여, 횃불의 거친 불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게… 뭐야?” 민준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이런 곳이… 버려진 광산에 있었다고?” 유진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녀의 마력 감지 능력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듯했다. 마치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력의 원천이 깨어난 것처럼. 그녀의 몸을 감싼 마력 감지의 기운이 푸른빛으로 아른거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소리마저 울림이 없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그들의 발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통로를 따라 몇 발짝 걷자, 넓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제단이 우뚝 솟아 있었다. 짙은 회색빛의 제단은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는…
민준은 숨을 들이켰다.
투명하고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수정 구슬이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구슬은,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 다시 토해내는 듯한 영롱함을 자랑했다. 그 속에서는 마치 은하수처럼 무수한 별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던전에서 획득한 그 어떤 보물 중에서도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마정석이나 마법 도구와도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이것이야말로 유진이 감지했던 ‘이질적인 마력’의 근원일 터였다.
제단 주변의 벽에는 방금 지나온 통로의 문양들과는 다른, 더욱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진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마법진들은 수정 구슬을 향해 끊임없이 푸른빛을 보내고 있었고, 구슬은 그 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간 전체가 고요하면서도 압도적인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빠… 이건….” 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수정 구슬에 완전히 홀린 듯했다.
민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난 7년간, 그를 짓눌렀던 F급 던전 탐사자의 굴레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오직 눈앞의 수정 구슬만이 존재했다.
이것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고대의 유산, 잠들어 있던 미지의 힘이었다.
어쩌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그의 평범했던 삶에 드리워진 거대한 균열이었다.
그가 홀린 듯 수정 구슬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폭주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동시에 제단 주변의 마법진들이 섬뜩한 굉음을 내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콰앙-!
강렬한 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꿰뚫는 듯한 엄청난 마력의 파동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그는 손을 뻗어 수정 구슬을 향했던 자신의 손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열기가 아니라, 고대의 힘이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오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었다.
(1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