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심연의 속삭임
지하 수천 미터 아래, 시간조차 길을 잃어버린 듯한 공간. 강철 거인 아레스의 육중한 발소리가 텅 빈 회랑에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같기도, 태고의 정적을 깨뜨리는 망치 소리 같기도 했다. 콕핏 안, 태혁의 시야를 가득 채운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주위의 잔해가 3D 모델로 구현되어 있었다.
“태혁 씨, 경로 안전도 87%. 그래도 불안정한 구간이 많으니 주의해요.”
차분하지만 미세한 긴장감이 섞인 유진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지상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에서 모든 데이터를 분석하며 그를 서포트하는 유진은, 태혁에게 이 심연 속 유일한 길잡이였다.
“87%면 양반이지. 지난번에 60%짜리도 뚫었는데 뭘.”
태혁은 콧방귀를 뀌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고대 문명의 잔해가 흩뿌려진 복도, 그 위에 내려앉은 수십만 년의 먼지가 아레스의 움직임에 따라 뽀얗게 일어났다. 아레스의 스캐너가 전방을 훑는 동안, 콕핏 내부는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그럼요, 태혁 씨 실력이라면 백악기 공룡 화석 위도 런웨이처럼 걸으실 분이죠. 하지만 여기는 공룡 뼈 대신 고대 방어 시스템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곳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유진의 지적에 태혁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잊혀진 고대 문명이 남긴, 미지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지하 유적. 탐사팀이 발을 들일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레스의 센서가 강한 에너지 반응을 감지했다.
“유진, 전방에 뭔가 있어. 스캔 결과는?”
“지금 분석 중… 에너지 파형이 복잡해요. 기존에 기록된 어떤 것과도 달라요.”
태혁은 아레스를 멈춰 세웠다. 정면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원형 공간이었다. 중심에는 거대한 제단 같은 구조물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주위를 십여 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었다. 기둥과 제단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기묘한 문양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흡사 거대한 기계 장치의 코어 같기도 했다.
“이건… 유적의 심장이 아닐까?” 태혁의 중얼거림에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능성이 높아요. 이런 형태의 에너지는 이전에 발견된 유적 에너지 발생기와 유사하지만, 훨씬 강력하고 안정적이에요. 태혁 씨, 조금 더 접근해서 상세 스캔을 해주세요.”
아레스는 조심스럽게 제단에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대한 철골 다리가 고대 바닥을 짓누를 때마다, 공간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제단 가까이 접근하자, 스크린에 더욱 선명한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 문양들… 에너지를 증폭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그런데 이 중앙 문자는… ‘경고’?”
태혁의 눈이 스크린에 고정됐다. 경고 문양 아래에는 더욱 복잡한 도형들이 얽혀 있었는데, 그것들이 갑자기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잉-!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고주파음이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깨고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존재처럼, 기둥을 둘러싸고 있던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태혁 씨! 위험해요! 에너지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어요! 제단이 활성화되고 있어요!” 유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콰아앙!
가장 가까운 기둥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며 아레스의 방패에 강타했다. 전신에 충격이 전해졌다. 콕핏 내부의 경고등이 붉게 번쩍였다.
“젠장! 무슨 짓을 한 거야, 고대인들!”
태혁은 본능적으로 아레스를 후방으로 급선회시켰다. 제단 주위의 기둥들에서 연쇄적으로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빔 형태의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바닥과 벽을 갈랐다.
“방어 시스템이 작동했어! 태혁 씨, 패턴을 파악해야 해요!”
“파악이고 뭐고 일단 피해야겠는데! 이건 그냥 무차별 공격이잖아!”
아레스는 거대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민첩성으로 빔 공격을 회피했다. 쿵, 쿵, 콰과광! 빔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섬광과 함께 암석 파편이 튀어 올랐다. 태혁은 조종간을 거칠게 꺾으며 아레스를 춤추듯 움직였다.
“유진! 저 에너지 코어를 파괴해야 해! 저게 근원인 것 같아!”
“안 돼요! 코어를 직접 공격하면 유적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어요! 일단 방어 시스템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해요!”
“어떻게?! 다 막는 것도 한계가 있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에너지 빔에 아레스의 방어막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아레스의 오른팔에 장착된 플라스마 캐논이 전개됐다.
“그럼 일단 저 기둥들을 부숴서 화력을 줄일 수밖에!”
콰아앙! 태혁은 지체 없이 기둥 하나를 겨냥해 플라스마 캐논을 발사했다. 푸른빛 섬광이 기둥에 명중했지만, 기둥은 흔들릴 뿐 파괴되지 않았다. 고대 문명의 기술은 상상 이상으로 견고했다.
“젠장, 끄떡도 안 해!”
“기둥은 직접적인 공격보다, 에너지 흐름을 역으로 이용해야 할 것 같아요! 태혁 씨, 잠시만 버텨줘요! 패턴 분석 중이에요!”
유진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태혁은 아레스를 굴리며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기둥들에서 발사되는 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어! 어서!”
그때, 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명료하게 들려왔다.
“태혁 씨! 기둥들의 에너지 흐름에 미세한 공백이 있어요! 모든 기둥이 동시에 발사하는 건 아니에요! 회전 주기가 있어요! 다음 빔이 발사되는 순간, 가장 먼저 발사되었던 기둥의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약해져요! 그때!”
태혁은 유진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번뜩였다. 그 말은 즉, 가장 먼저 발사된 기둥이 다음 빔 발사를 준비하는 찰나의 순간에 방어막이 약해진다는 뜻이었다.
“알았다! 유진, 카운트!”
“셋! 둘! 하나! 지금이에요, 태혁 씨! 2시 방향 기둥!”
아레스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날아오는 빔 사이를 헤치며, 태혁은 2시 방향 기둥에 플라스마 캐논을 조준했다.
콰아앙!
이번에는 달랐다. 플라스마 캐논이 기둥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기둥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뿜어내던 문양의 빛이 흐릿해졌다.
“좋았어! 유진, 다음!”
유진은 쉴 새 없이 패턴을 읽고 태혁에게 기둥의 약점 타이밍을 외쳤다. 태혁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콰앙! 기둥들이 하나둘씩 금이 가고 빛을 잃어갔다.
마침내 마지막 기둥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빛을 잃자, 공간을 뒤흔들던 고주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제단 중앙의 코어도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아레스의 방어막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휴우… 간신히 살았네. 유진, 너 아니었으면 아레스 고철될 뻔했어.”
태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조종간을 바로잡았다.
“임무 성공이에요, 태혁 씨.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 같지는 않아요.”
유진의 말에 태혁은 스크린을 응시했다. 제단 중앙, 에너지 코어를 둘러싸고 있던 고대 문양들이 흐릿하게 빛을 발하더니, 중앙의 바닥이 거대한 문처럼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더욱 깊은 어둠으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그리고 계단 한가운데, 기이한 빛을 내뿜는 붉은색 수정이 박혀 있었다.
“이건… 또 다른 문이잖아?”
태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단 아래는 말 그대로 심연이었다. 스캐너조차 바닥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어둠.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붉은 수정이 내뿜는 빛은, 마치 무언가를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했다.
“스캔 결과… 이전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금속 물질이 검출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수정… 엄청난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어요. 마치… 심장을 박동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유진의 목소리에서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태혁은 아레스의 콕핏 안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심연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잊혀진 고대 문명이 숨기려 했던 진실은 무엇이며, 이 붉은 수정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진. 준비해. 더 깊이 들어간다.”
태혁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레스의 육중한 몸체가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어둠이 기다리는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수정의 섬뜩한 빛이 그들의 앞길을 비추는 듯, 혹은 유인하는 듯, 심연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