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잊혀진 대륙의 변방.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황무지 저편으로, 련은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며칠 밤낮을 걸어왔던가. 지쳐가는 몸을 애써 다독이며 그는 심장의 떨림에 의지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희미하게 자신을 부르는 듯한, 영혼의 속삭임 같은 기운. 그것은 그의 몸속에 흐르는 미약한 선골(仙骨)을 자극하는 고대의 파동이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거대한 절벽의 가장자리. 마치 대지가 무언가에 찢겨 벌어진 듯한 깊은 협곡이었다. 그 아래는 끝없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련은 숨을 들이켰다. 이곳이었다. 파동의 근원.

절벽 틈새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낡은 석판 하나. 기이한 고대 문양이 새겨진 석판은 마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곧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련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석판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끝에 닿자마자, 석판의 문양들이 푸른빛으로 섬광처럼 빛났다.

“크윽!”

강렬한 영기가 손바닥을 통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거대한 폭포수가 좁은 통로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고통. 동시에 그의 뇌리에는 수많은 영상과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다. 폐허가 된 도시, 하늘로 치솟은 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끝없는 지하의 미궁… 마지막으로 선명하게 박힌 하나의 글귀.

*‘현암 비궁(玄巖秘宮)의 문이 열리리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진실을 찾는 자, 고대 선인의 유산을 마주할지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련은 비틀거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석판의 빛은 이내 사그라들었지만, 그의 손바닥에는 마치 낙인처럼 선명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길을 가리키는 지도이자, 초대장이었다.

련은 절벽 아래의 어둠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문이 숨겨져 있었다. 석판이 빛을 발하며 절벽의 일부가 부서지고 드러난 입구였다. 차가운 바람이 지하에서 불어 올라왔다. 죽음의 냄새와, 동시에 지독히도 유혹적인 생명의 기운이 뒤섞인 바람이었다.

“현암 비궁….”

련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두려움 대신, 끓어오르는 탐험심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의 등 뒤에 짊어진 청풍검(淸風劍)이 희미하게 울리는 듯했다.

“가자.”

그는 망설임 없이 절벽 틈새로 몸을 던졌다.

***

낙하하는 감각은 길지 않았다. 그의 몸을 감싼 영기 보호막이 부드럽게 충격을 흡수하며 깊은 동굴 바닥에 착지시켰다. 사방은 칠흑 같았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천년의 먼지와 함께 숙성된 듯한 고대의 영기(靈氣). 련은 손바닥의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예상보다 훨씬 광활했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간이 영기의 흐름으로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벽면을 따라 걷던 련은 이내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석벽과 마주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길. 고대 선인의 흔적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기의 흐름 변화에 련은 본능적으로 청풍검을 뽑아 들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기운.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련은 영안(靈眼)을 열어 기운의 근원을 찾았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거대한 그림자.

“으르릉…!”

낮게 울리는 짐승의 소리. 녹빛 안광이 어둠을 찢고 련을 향해 번뜩였다. 지하의 기운을 먹고 자란 요수(妖獸)였다. 바위와 흙이 뒤섞인 몸통에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거대한 늑대 형상. 련은 검에 영기를 불어넣었다. 청풍검의 검신에서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솟아올랐다.

“어디, 고대의 손님을 환영하는 방법을 좀 볼까!”

련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청풍검이 허공을 가르자 날카로운 검기가 바람처럼 뻗어나가 요수를 꿰뚫었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요수는 고대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이런 하급 요수는 현암 비궁의 문지기에 불과하리라. 련은 얕은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많은 갈림길과 미로 같은 통로들이 이어졌다. 련은 손바닥의 문양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아갔다. 간혹 나타나는 환영 진법이나 낙석 함정들은 그의 예리한 감각과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영기로 어렵지 않게 파훼할 수 있었다. 현암 비궁은 거대한 존재였다. 미로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지하 도시의 폐허에 가까웠다.

마침내 거대한 광장에 도착했을 때, 련은 숨을 들이켰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비석이 서 있었고, 그 주변으로 희미한 결계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계 안에는…!

“이건….”

자그마한 은빛 털을 가진 여우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여우가 아니었다. 맑은 눈빛에는 영기가 서려 있었고, 몸 주변에는 반짝이는 영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딘가에 갇힌 채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 분명 결계에 갇힌 영수(靈獸)였다.

련은 조심스럽게 결계에 손을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강렬한 속박의 기운. 이 결계는 단순한 힘으로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대 선인의 지혜가 담긴 진법이로군. 강제로 부수려다가는 영수가 다칠 수도 있다.’*

련은 비석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을 살폈다. 복잡하게 얽힌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진법의 핵심이었다. 련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영기를 섬세하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비석의 문양 하나하나에 자신의 영기를 불어넣으며 진법의 흐름을 읽었다. 얽히고설킨 영기의 실타래를 푸는 듯한 작업이었다.

한 시진(二時間) 가량이 흘렀을까. 련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집중력 소모가 극심했지만, 그는 끈질기게 진법을 해독했다. 마침내 마지막 문양에 영기를 불어넣자, 결계가 서서히 연기처럼 사라졌다.

“캭…!”

자유를 되찾은 은빛 여우가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푸른 눈동자가 련을 향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이내 그 눈빛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여우는 조심스럽게 련에게 다가와 그의 발치에 툭, 하고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 련의 어깨 위로 훌쩍 뛰어올라 앉았다.

“너… 이름이 뭐니?” 련이 묻자, 여우는 맑은 눈으로 련을 응시할 뿐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련의 머릿속에 울리는 희미한 목소리가 있었다.

*‘…비령(飛靈)….’*

련은 놀랐다. 영수의 정신 감응 능력. 고대 선인의 유산답게 특별한 존재였다.

“비령이구나.”

비령은 련의 어깨 위에서 작게 꼬리를 흔들었다. 이제 련은 혼자가 아니었다. 비령은 련의 손바닥 문양과 같은 종류의 고대 영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나침반처럼, 비령은 고개를 한 방향으로 기울이며 련을 이끌었다.

***

비령의 인도로 현암 비궁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통로의 벽면에는 고대 선인들의 삶과 사상이 담긴 벽화들이 가득했다. 하늘을 나는 선인들, 자연의 기운을 다루는 자들, 그리고 거대한 용들과 교감하는 모습. 그들의 영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하고 강대했다. 벽화의 끝자락에는 검은 그림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한 불길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진 듯한 암시였다.

“이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련이 중얼거렸다.

비령은 련의 어깨 위에서 작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련의 정신 속으로 또렷한 영상 하나를 보냈다. 광활한 우주 공간, 그리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선인들의 모습. 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승천’했다는 암시였다. 그리고 이 비궁에는 그들의 마지막 ‘유산’이 남아 있다는 강렬한 기운이 전해졌다.

둘은 거대한 석문을 지나 마침내 현암 비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그곳은 드넓은 원형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칠흑 같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푸른 구슬이 둥둥 떠 있었다. 그 구슬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영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광의 핵(天光之核)…!” 련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벽화에서 보았던, 고대 선인들이 숭배하던 그들의 모든 지혜와 영혼이 담겼다는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존재가 있었다. 제단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한 석상. 하지만 단순한 석상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영기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았다. 고대 선인들이 천광의 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현암 비궁의 최종 수호자였다.

“키야아아아!”

석상 용은 련과 비령을 감지하자마자 거대한 몸을 뒤틀며 굉음을 냈다.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거대한 발톱이 련을 향해 뻗어왔다. 련은 재빨리 몸을 피하며 청풍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용의 단단한 비늘에 부딪혔지만,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젠장, 엄청나게 단단하군!”

비령은 련의 어깨 위에서 작은 앞발을 휘두르며 꺙꺙거렸다. 그리고 다시 련의 정신 속으로 하나의 영상을 보냈다. 용의 목덜미, 그리고 그곳에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 하나. 약점이었다.

련은 용의 공격을 피하며 약점을 찾아냈다. 용의 목덜미 깊숙이 박혀 있는 푸른색의 고대 문양. 그곳에서 용의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련은 용의 공격 타이밍을 노렸다. 거대한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찍는 순간, 련은 검을 등에 다시 꽂고 순식간에 용의 몸을 타고 뛰어올랐다.

“이거나 먹어라!”

련은 영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먹에 집중시켰다. 단순한 주먹이 아니었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현암 비궁의 문양이 푸른빛을 발하며 그의 주먹과 공명했다. 고대 선인의 기운이 그의 몸속에서 폭발하는 듯했다. 그는 모든 힘을 실어 용의 목덜미, 그 푸른 문양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용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푸른 문양에서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쩍, 하고 금이 갔다. 용의 몸 전체에서 영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석상 용은 굉음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이내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정적이 흘렀다. 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영기가 고갈되어 허물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천광의 핵을 향했다. 푸른 구슬은 여전히 제단 위에 둥둥 떠서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령은 련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려 천광의 핵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구슬 주변을 맴돌며 맑은 울음소리를 냈다. 련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제단으로 다가갔다. 구슬에 손을 대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천광의 핵은 단순한 지혜의 보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 선인들이 남긴 하나의 거대한 ‘문’이었다. 우주 너머의 차원으로 이어지는 문이자, 그들의 영혼이 담긴 매개체였다. 구슬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지식과 영혼의 흐름이 련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과거의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대 선인들이 이 비궁을 건설하고, 힘을 합쳐 승천의 길을 열었던 과정. 그리고 그들이 남긴, 마지막 가르침.

*‘진정한 깨달음은 닫힌 곳에 있지 않다. 세상은 무한하고,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너의 한계를 넘어서라.’*

그것은 련이 꿈꾸던 선도(仙道)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갇힌 공간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련은 천광의 핵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구슬은 그의 품속에서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령은 련의 어깨 위로 다시 올라와 그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비령의 눈빛에는 만족감과 새로운 기대가 담겨 있었다.

현암 비궁은 고대 선인들의 모든 것을 담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장소였다. 련은 낡은 석벽을 타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섰다. 잊혀진 황무지에 다시금 밤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그의 품에는 천광의 핵이, 어깨 위에는 비령이 함께했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선도(仙道)의 시작이었다. 련은 멀리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대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머나먼 우주 저편, 고대 선인들이 향했다는 그곳. 언젠가 자신 또한 그 길을 따르리라. 그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영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