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23화. 깨어진 약속의 파편**

숨결마저 삼켜버릴 듯 고요한 어둠 속, 지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멎을 줄 모르는 심장 박동이 온몸을 때렸다. 옆에서 그녀를 감싸고 선 카엘의 단단한 어깨가 희미한 온기를 전했지만, 그 온기마저 현실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지금, 이래서는 안 되는 곳에 있었다. 어쩌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처럼.

방금 전까지 그들을 쫓던 ‘시간의 사냥꾼’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 목표를 정하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언제든 다시 그림자처럼 나타나 우리를 덮칠 터였다.

“괜찮아?” 카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늘 흔들림 없던 그의 음성에도, 아주 미세한 불안의 파동이 섞여 있었다. 그것이 지우의 불안을 더욱 증폭시켰다. 카엘마저 흔들린다는 건, 정말 모든 것이 끝에 다다랐다는 뜻이니까.

지우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제 눈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저렇게 모든 것을 통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지우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담긴 무한한 애정과, 동시에 체념에 가까운 슬픔이 지우의 가슴을 저몄다.

“내가… 괜한 짐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카엘?” 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곳에 떨어진 이방인, 시간을 거스른 이방인인 자신 때문에 카엘의 평화로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카엘은 말없이 지우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지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아물 듯 아련한 통증과 함께 낯선 위안이 찾아들었다.

“네가 내게 온 순간부터, 짐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해졌어, 지우.” 그의 목소리는 이제 평소의 잔잔한 울림을 되찾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겠지. 내 오랜 고독에 네가 빛을 가져다줬어.”

고독. 그의 삶은 영원에 가까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시간의 숲을 지키며 홀로 존재해왔다. 인간의 덧없는 시간 개념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겁의 세월을. 지우는 그런 카엘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질적인 조각이었다. 그의 말대로, 지우는 빛이었을까, 아니면 파멸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였을까.

그들이 숨어든 곳은 시간의 숲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고목의 속이었다. 뒤틀린 가지와 옹이진 줄기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맥동하는 듯한 기이한 공간. 이곳이야말로, 카엘의 힘이 가장 강하게 발현되는 성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의 흐름이 가장 취약하게 뒤섞이는 위험한 장소이기도 했다.

문득, 고목의 줄기 한편에 새겨진 고대 문자가 지우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카엘이 설명해주었던, 종족 간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경고문이었다. ‘다른 흐름에서 온 자와 맺어지는 순간, 시간의 심장이 멎으리라.’ 저주에 가까운 문구는 언제나 지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들이 함께하는 매 순간이, 어쩌면 세상의 멸망을 향한 발걸음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

“카엘…” 지우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우리, 정말 괜찮을까? 이 모든 게… 결국 우리를 갈라놓을 운명이라면…”

카엘은 지우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별처럼 빛났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지우. 만들어가는 것이지. 설령 세상의 모든 시간이 우리를 부정한다 해도, 나의 시간은 너에게로 흐른다.”

그의 말은 지우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뜻한 불꽃을 지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불꽃은 더 큰 파멸을 예고하는 불길처럼 보였다. 카엘의 삶은 이 세계의 균형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숲을 지탱하는 근원이었다. 그런 그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이방인인 자신과 엮이는 것은 분명히 이 세계에 거대한 균열을 가져올 터였다.

그때였다.

고목의 줄기를 통해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짐승이 움직이는 듯한, 둔중하고 불길한 떨림. 카엘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굳건했던 평정이 사라졌다. 그의 눈빛에 번개 같은 긴장이 스쳤다.

“지우, 정신을 집중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들이 이곳까지 추격해왔어. 이전보다 훨씬 강한 기운이야.”

지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추적자, 시간의 사냥꾼들은 단순히 강력한 전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의 틈새를 읽어내고, 흐름을 조작하는 불길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 고목의 심장에 가까운 곳까지 온다는 것은, 그들이 카엘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곳까지?” 지우는 믿을 수 없었다. 카엘의 힘으로도 쉽게 은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카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우리를 인도했어. 혹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흔적을 통해.”

그 순간, 지우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그녀가 이곳에 온 방식,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념품’. 손목에 새겨진,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계 장치의 흔적. 그것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자, 그들을 인도하는 이정표가 된 것일까.

고목의 외부에서, 찢어지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거대한 나무 줄기 일부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사냥꾼들이 카엘의 결계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버틸 수 없어.” 카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자신의 근원과 연결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격은 상상 이상인 듯했다. “지우, 내가 틈을 만들 테니 도망쳐야 해.”

“안 돼!” 지우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혼자 보낼 수 없어! 내가 여기 온 것도, 당신이 이런 위험에 처한 것도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짐이 된다면, 차라리 당신과 함께 사라질래!”

카엘의 눈빛이 고통스럽게 일렁였다.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살아남는 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야. 네가 시간을 거슬러 다시 너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목의 한쪽 벽면이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찢겨진 틈새로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들어왔고, 그 사이로 빛을 흡수하는 듯한 검은 망토를 두른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푸른 섬광을 내뿜는 검은 수정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찾았다, 시간의 수호자.” 그림자 중 하나가 섬뜩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얼어붙은 쇳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대의 불경한 인간 짝도.”

지우는 본능적으로 카엘의 뒤로 숨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은 이미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카엘의 눈동자가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수많은 시간의 흐름이 엉켜 흐르는 듯한 기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감히 이곳을 침범하다니.” 카엘의 목소리가 고목의 내부를 울렸다. 그의 음성에는 분노와, 이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시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 너희는 결코 이 세계를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그림자들이 동시에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푸른 섬광이 사방으로 번쩍이며, 고목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카엘은 지우를 등 뒤로 숨긴 채, 모든 공격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냈다. 그의 푸른빛 결계가 사납게 요동쳤다.

“카엘!” 지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어깨를 강타한 빛줄기가 결계를 뚫고 들어가자, 카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시간의 수호자여,” 그림자들의 우두머리가 한 발짝 다가섰다. 그의 검은 망토 안에서, 섬뜩한 붉은 눈빛이 번뜩였다. “그대의 힘은 이방인에게 더럽혀졌다. 이제 그대의 심장은 더 이상 온전하지 못해.”

그의 말에 지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방인에게 더럽혀진 심장. 그들의 사랑이, 결국 카엘의 약점이 된 것일까.

그 순간, 우두머리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에너지 덩어리가 카엘의 심장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카엘은 방어할 틈도 없이 그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의 몸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푸른 기운이 삽시간에 흩어지고, 피 한 줄기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카엘!!!” 지우는 미친 듯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카엘의 몸이 휘청이자, 지우는 그를 부축하려 달려들었다.

카엘은 고통으로 떨리는 손으로 지우의 뺨을 감쌌다. 그의 눈빛은 흐려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애정만은 변함없었다. “지우… 약속해… 살아남겠다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목의 바닥에서 갑작스러운 균열이 생겨났다. 마치 세상의 심장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심연이 그들의 발밑에서 입을 벌렸다. 시간의 숲 전체가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이 뒤엉켜 마치 거대한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안 돼! 카엘!” 지우는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균열은 그녀의 발밑을 삼켰고, 그녀는 카엘의 손을 놓친 채 속수무책으로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향해 절규하며 손을 뻗는 카엘의 처절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는 그의 푸른 눈동자.

**”…지우…”**

그의 목소리가 찢겨지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지우는 암흑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그녀의 눈앞에서, 카엘의 마지막 모습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심장이 검게 물들어가는 그의 모습. 그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시간의 심장이 멎는 순간에 나타나는, 파멸의 징조였다.

나는… 나는 그를 파괴한 것인가. 우리의 사랑이, 결국 이 세계의 균형을 깨뜨린 것인가.

과연, 그녀는 어디로 떨어진 것일까. 그리고, 검게 물든 심장을 안고 남겨진 카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제2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