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슈퍼마켓 복도에 먼지 섞인 햇살이 위태롭게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창은 깨지고 프레임만 앙상하게 남은 곳이 태반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썩은 음식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지아는 잔뜩 웅크린 채 진열대 구석을 살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녹슨 칼날이 희미하게 빛났다.
“강태 씨, 여기는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저번에 누가 싹 다 쓸어간 것 같아요.”
지아의 투덜거림에 조금 앞서 걷던 강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흙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그럼 네가 먼저 왔어야지. 망할 놈의 세상, 먼저 먹는 놈이 임자다.”
강태의 말은 언제나처럼 툭툭 내뱉는 식이었다. 지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긴, 강태 씨는 언제나 먼저 먹는 쪽이셨죠.”
그녀의 비꼼에 강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해. 너처럼 이딴 폐기된 초코바나 쳐다보면서 멍 때릴 시간에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여야 한다고.”
그가 가리킨 곳에는 바스라진 상자 속에서 삐져나온 초코바 포장지가 보였다. 유통기한은 아마 세상이 망하기 전,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었으리라. 지아는 무심코 손을 뻗어 초코바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는 바스락거렸고, 찌그러진 초코바는 제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왠지 이 세상이 멀쩡했을 땐, 달콤하고 맛있었을 것 같아요.”
“환상 좀 그만 품어. 헛구역질 나오기 전에 버려.”
강태는 단호하게 말하며 한쪽 발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캔을 툭 찼다. 캔은 깡, 소리를 내며 복도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르르륵…*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아의 손에 들려있던 초코바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어떡해요, 강태 씨! 저, 저 소리는…!”
“젠장. 또 저놈들이야.”
강태의 얼굴에 순간적인 긴장감이 스쳤다. 그는 재빨리 칼을 뽑아 들고 지아의 팔목을 낚아챘다.
“뛰어! 뒤도 돌아보지 마!”
두 사람은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지아는 강태의 손에 이끌려 진열대 사이를 미친 듯이 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타닥, 타닥* 하는 발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세상이 망하고 난 뒤 나타난 돌연변이 생명체, ‘크롤러’였다. 사람의 형상에서 비틀리고 뒤틀린, 괴물 같은 존재.
“저, 저기요! 제, 제가… 너무, 너무 느려서…!”
지아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그녀의 발이 삐끗하며 균형을 잃었다. 주저앉으려는 찰나, 강태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지금 넘어지면 끝장이야! 정신 차려!”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동시에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지아는 강태의 등 너머로 보이는 크롤러의 섬뜩한 형체를 슬쩍 엿보았다. 네 발로 기어오는 모습이 기괴하고 빨랐다. 눈 대신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점이 번뜩였다.
“젠장, 코너로 몰려!”
강태가 낮게 읊조렸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통로가 막힌 구석이었다. 폐쇄된 창고의 굳게 닫힌 철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크롤러는 더 이상 거침없이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해왔다.
“강태 씨! 어떡해요! 저거… 엄청 빠르잖아요!”
지아가 거의 울먹이며 강태의 팔을 붙잡았다. 강태는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낡은 환풍구였다.
“저거다!”
강태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나를 밟고 올라서. 환풍구 구멍이 작아. 네가 먼저 들어가!”
“네?! 강태 씨는요?!”
“잔말 말고 올라서! 내가 뒤를 막겠다!”
강태는 지체 없이 몸을 숙여 어깨를 내밀었다. 지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어깨를 밟고 올라섰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환풍구 입구는 그녀의 몸통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그녀는 칼날로 낡은 철망을 뜯어내려 애썼다.
*그르르륵! 으르르륵!*
크롤러가 들이닥쳐 강태의 등 뒤에서 사납게 포효했다. 강태는 칼을 휘두르며 크롤러의 진입을 막아섰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빨리! 서둘러!”
강태의 거친 숨소리가 지아의 귀에 박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환풍구 철망을 뜯어냈다. 손가락이 아프고 손톱이 부러지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뻥 뚫린 구멍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강태 씨! 어서요!”
지아가 안쪽에서 손을 뻗었다. 강태는 크롤러를 칼로 찍어내며 겨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아의 손을 잡고 몸을 웅크린 채 환풍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콰르릉! 쾅!*
바로 그때, 크롤러가 환풍구 입구를 거대한 발톱으로 후려갈겼다. 환풍구가 흔들리며 지아와 강태는 균형을 잃고 어두운 통로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먼지와 쇳덩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쿵!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바닥에 나란히 떨어졌다. 등 뒤에서는 크롤러가 환풍구 입구를 긁어대는 끔찍한 소리가 계속되었다. 철제 구조물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괜찮아?”
강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아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거칠었다.
“네, 네… 강태 씨는요? 팔에서 피가…”
지아가 그의 팔을 가리켰다. 피는 이미 팔꿈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이 정도는 괜찮아.”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피로감이 역력했다. 지아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손에 잡힌 것을 꺼내들었다. 아까 바닥에 떨어뜨렸던, 포장지가 더 찌그러진 초코바였다.
“그래도… 이거 하나 건졌어요. 강태 씨, 이럴 때일수록 단 게 필요하대요.”
지아가 멋쩍게 웃으며 초코바를 내밀었다. 강태는 그녀의 손에 들린 엉망진창 초코바를, 그리고 그보다 더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미친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스치는 희미한 빛.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쥐 소리 같지는 않았다. 강태와 지아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이 어둠 속, 환풍구 통로 안은 과연 안전한 곳일까? 아니면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초코바의 달콤한 유혹은 잠시 미뤄졌다. 살아남는다는 것. 그 지독하고 혹독한 현실만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