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무겁게 짓눌렸다. 눅진한 모래먼지 같은 감촉이 폐부를 긁어내는 기분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컥, 컥. 낡은 시동이 걸리듯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잔해와 뒤틀린 철골이었다.
“젠장…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는 찢어지듯 갈라졌다. 입안은 사막을 통과한 듯 바싹 말라붙어 있었고, 온몸의 근육은 며칠 밤낮을 혹사당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자, 머리가 핑 돌면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익숙한 도시의 모습은 간데없고, 마치 거대한 괴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후 게워낸 듯한 폐허만이 가득했다. 반쯤 부서진 고층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도로 위에는 녹슨 차량들이 뒤집히거나 서로 엉킨 채 방치되어 있었다. 공기는 텁텁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쇳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계의 종말을 다룬 영화 세트장 같았다. 아니, 세트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꿈인가? 개꿈?”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명치께에서부터 묵직한 공포가 치고 올라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정확히는 마지막 기억 속에서 나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졸고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아이돌 음악이 흘러나왔고, 손에는 내일 마감할 보고서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웹소설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황량한 폐허 속, 허름한 작업복 같은 옷을 입고 먼지투성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이게 바로 그 웹소설에서나 보던… 이세계 전생? 아니, 전생보다는 ‘이세계 전이’나 ‘소환’에 가까울 텐데. 문제는 여긴 ‘이세계’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동시에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망해버린’ 세계.
“물을… 물을 마셔야 해.”
몸이 먼저 반응했다. 타들어 가는 목구멍이 가장 시급한 명령을 내렸다. 주머니를 뒤적였다. 텅 비어 있었다. 손목에는 낡은 디지털 시계가 채워져 있었는데, 액정은 깨져 있었고 시간은 ‘—‘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허리춤에는… 오? 묵직한 감촉에 손을 대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녹슨 공구 칼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지? 기억에 없었다.
그래, 일단 물. 어떻게든 물을 찾아야 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몸에 큰 상처는 없었다. 다만 기운이 없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삐걱이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래된 로봇처럼.
주변을 스캔했다. 망가진 건물들, 무너진 고가도로, 검게 그을린 상점 간판들. 간혹 기이한 형태로 자라난 식물들이 보였다. 넝쿨처럼 벽을 타고 올라간 보라색 줄기, 사람 허리 높이까지 자란 붉은 버섯 무리. 가까이 다가가자 기분 나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 식물들이 안전한지는 알 수 없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큰코다칠 게 분명했다.
저 멀리, 그래도 비교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편의점’ 간판이 반쯤 부서진 채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편의점이라면… 뭐라도 있을 거야!
굳은 다리를 움직여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즐비했고, 어디가 함정일지 모르는 지반 붕괴 흔적도 곳곳에 있었다. 발밑을 조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편의점 입구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자동문은 흔적도 없었고, 커다란 유리창은 산산조각 나 내부로 쏟아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선반들은 대부분 엎어져 있었고, 진열되었던 상품들은 바닥에 나뒹굴거나 짓밟혀 있었다.
“물이… 물이 있을까?”
나는 필사적으로 음료 코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망할. 음료수 진열대도 폭격을 맞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깨진 병 조각들이 즐비했고, 터져버린 캔에서 흘러나온 끈적이는 액체가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절망감이 목을 조여왔다.
그때였다.
철커덕!
내 뒤편, 계산대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나 혼자가 아니었다. 분명 이곳에는 나 말고 다른 생물이 존재했다.
숨을 죽였다. 녹슨 공구 칼을 꽉 쥐었다. 심장이 귀청이 터질 듯 울렸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괴물이었다.
원래는 강아지였을까? 아니면 고양이? 크기는 중형견만 했지만,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피부는 괴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엇보다 섬뜩한 건, 온몸에 불규칙하게 솟아난 비늘 같은 것들과, 이빨처럼 날카롭게 튀어나온 뼈 조각들이었다. 눈은 탁한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녀석은 계산대 아래쪽, 부서진 과자 부스러기를 핥고 있었다. 아마도 먹을 것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녀석의 노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리고는 한 발짝, 두 발짝,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이런 건 게임에서나 보는 거라고!”
내뱉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쩌면 좋지? 이 녹슨 공구 칼로 저 괴물을 상대하라고? 평생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해본 나인데?
괴물은 내가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녀석이 튀어 오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생각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싸움은 필패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이 좁은 편의점 안에서?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부서진 형광등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선이 끊어져 대롱거리는 통신 케이블도 있었다.
그래, 저거다!
괴물이 몸을 웅크린 순간,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옆에 쓰러져 있던 진열대 뒤로 숨었다. 녀석은 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그 짧은 틈을 이용해 나는 진열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크르르르!”
괴물은 진열대 뒤편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시 으르렁거렸다. 몸을 돌려 위로 뛰어오르려 했지만, 진열대가 높지는 않아도 녀석에게는 버거운 높이였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나는 손을 뻗어 끊어진 통신 케이블을 잡았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고무 피복 전선이었지만, 속에는 여러 가닥의 구리선이 얽혀 있었다. 꽤 튼튼해 보였다.
“이게 먹힐까?”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케이블의 한쪽 끝을 잡고 휘둘렀다. 마치 쇠사슬을 휘두르듯이. 목표는 저 녀석의 다리.
휙!
기대에 못 미치는 짧은 비거리였지만, 케이블 끝이 괴물의 앞다리를 스쳤다. 녀석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한 번 더!’
나는 다시 케이블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더 크게, 더 힘껏. 녀석의 몸통을 향해.
탁!
예상외로 정확하게 몸통에 명중했다. 녀석은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순간적으로 기회를 잡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진열대에서 뛰어내려 재빨리 괴물에게 달려갔다. 녀석이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틈을 타, 손에 쥐고 있던 녹슨 공구 칼을 녀석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꾸우우욱!
괴이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녀석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손에 묻었다. 녀석은 짧게 경련하더니,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난생 처음으로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동시에 생존했다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괴물의 시체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물을 찾기 시작했다. 선반들을 하나하나 뒤지며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구석에 쌓인 박스 더미 뒤에서 기적 같은 것을 발견했다.
페트병에 담긴 생수. 찌그러지고 먼지가 가득했지만, 뚜껑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심지어 유통기한도…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페트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꿀꺽, 꿀꺽.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세상 그 어떤 진미보다도 달콤하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죽을 것 같았던 갈증이 가시는 동시에, 흐릿했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살았어… 일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생수 한 병을 찾았을 뿐인데, 마치 거대한 산이라도 넘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 잿빛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식량, 안전한 잠자리,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정보.
괴물이 나올 것을 대비해, 바닥에 떨어진 통조림 캔 몇 개와,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에너지바 몇 개를 주워 배낭처럼 생긴 찢어진 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아까 사용했던 녹슨 공구 칼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편의점 밖으로 나왔을 때, 해는 이미 기울어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빛은 폐허의 풍경을 더욱 쓸쓸하고 기이하게 만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음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움직임들이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내가 과연 이 세계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문했다. 막막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미한 불꽃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살아남아야 해. 어떻게든. 이 불친절한 세계에서, 나 혼자서.
하늘은 잿빛 노을로 물들었고,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가 진짜 생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