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2화: 벽을 뚫는 기운

강현우는 오늘도 어김없이 해질녘의 고요를 맞이하고 있었다. 도심의 한복판, 낡은 아파트 707호. 거실 창밖으로는 희뿌연 노을이 마천루의 숲에 잠기고 있었다. 그는 반쯤 닳은 명상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정한 리듬에만 집중했다. 수십 년간 갈고닦은 내공심법(內功心法)은 이제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한 호수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고요는 자꾸만 깨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낡은 건물의 소음이려니 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 옆집 아이의 투정 섞인 울음소리.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소음들은 기이한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밤중에 방문이 삐걱거리고, 닫힌 창문이 덜컥거렸다. 주방 선반에 가지런히 놓아둔 컵이 홀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반복되는 현상은 현우의 본능적인 경각심을 일깨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심법이 깊은 경지에 들려는 찰나, 서재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건조한 소리. 마치 책 한 권이 책장에서 떨어지는 듯한.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서재의 모든 책들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몇 차례나 확인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그의 내면의 평화가 살짝 일렁였다.
“…또 시작인가.”
낮게 중얼거린 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이 닿는 마루바닥은 싸늘했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온기가 돌던 그의 집이었건만, 최근에는 이상하리만치 한기가 감돌았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피부를 파고드는 듯한, 불쾌한 종류의 차가움.

서재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스치는 곰팡내와 함께 섬뜩한 냉기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실내 공기는 정체된 듯 무거웠다. 그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가장 아끼던 무협 고서 한 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펼쳐진 채로.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책상 위, 늘 정돈되어 있던 붓통의 붓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먹물이 담겨 있던 벼루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곳을 휘젓고 지나간 것처럼.

현우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흐름이 보였다. 혼탁하고 불안정한 기운.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발버둥 치듯, 제멋대로 날뛰는 기운이었다. 그것은 서재의 한쪽 구석, 벽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양상으로 뭉쳐 있었다.
“무어냐, 네놈의 정체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흩어졌던 붓들이 일제히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굴렀다. 벼루 안의 먹물이 요동치며 가장자리로 넘쳐 흘렀다. 그리고 현우의 등 뒤에서, 닫혀 있던 서재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동시에 방 안의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현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벽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기운의 중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영적인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 물리적인 힘을 동반한, 그리고 명확한 의지를 가진 무언가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오랜 세월 쌓아온 내공이 기화(氣化)되어 외부로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공기 중의 혼탁한 기운들이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고 강인한 내공에 반응하며 물러서는 듯했다.
“더 이상 이 집을 어지럽히지 마라.”
현우의 목소리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천지를 호령하는 듯한, 단단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그러자, 현우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가는 기운과 마주친 벽 한구석의 혼탁한 기운이 갑자기 맹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서재의 모든 사물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책꽂이가 흔들렸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쿠르르릉!’
갑자기 서재의 벽에서 깊은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땅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었다. 벽지가 찢어지고, 그 아래 시멘트 벽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이 기운은 벽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에서, 무언가 시뻘건 섬광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핏빛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는 듯한.

그 순간, 현우의 귓가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수십 마리의 짐승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듯한, 혹은 찢어지는 쇳소리 같았다. 비명과 함께, 서재 전체의 기온이 급격히 영하로 떨어졌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폐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것은…!”
현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그림자가 스쳤다. 단순한 원혼이 아니었다. 아니, 원혼을 넘어선, 이 세계의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불순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그가 수십 년간 강호(江湖)를 떠돌며 겪었던 어떤 괴이한 존재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의 힘을 품고 있었다.

시뻘건 섬광이 번뜩이는 벽의 균열 사이로, 거대한 어둠의 형체가 비집고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강철 거인처럼, 혹은 검은 바위 산맥처럼 육중하고 위압적인 형상이었다.

현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감히 내 거처를 침범하느냐!”
그의 입에서 폭풍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이 서재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고서들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찢어진 벽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은 이제 방대한 푸른빛의 장막이 되어 균열 너머의 어둠을 밀어붙였다.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아파트 707호의 작은 서재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현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상대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이대로라면 아파트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의 온몸의 내공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푸른 장막이 더욱 거대해지고, 마치 파도처럼 균열을 향해 밀려갔다.
그러나 균열 너머의 어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핏빛 안광(眼光)이 그의 푸른 장막을 뚫고 들어오려 했다.

이 아파트, 707호.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이 오래된 벽 속에 숨겨진, 미지의 심연이 깨어나고 있었다.
현우는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