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서진 벽 너머, 굶주린 그림자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건물들이 이빨 빠진 거인처럼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한때는 번화했을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숨쉬는 것조차 버거운 황량함 그 자체였다. 바람은 재와 먼지를 휘몰아치며 폐허의 뼈대를 긁는 듯한 소리를 냈고, 살아있는 것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카엘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고쳐 썼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언제나처럼 탁하고 희미했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이미 뼈에 새겨진 본능과 같았다. 등에는 보급품으로 가득 찬 낡은 배낭이,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발밑을 비추는 희미한 손전등의 빛줄기뿐이었다.
“젠장, 또 막다른 길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통로 깊숙이 들어온 지 벌써 몇 시간째인지 알 수 없었다. 지도랍시고 들고 온, 심연의 강림 이전에 만들어진 낡은 설계도는 종잇조각처럼 무용지물이었다. 대지진과 뒤이은 변이 생명체들의 습격으로 도시는 완전히 뒤틀려버렸고, 길은 사라지고 새로운 균열과 붕괴만이 가득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정수 결정’이었다. 공동체의 유일한 생명줄인 정화 장치를 가동시키려면 더 많은 결정이 필요했다. 마지막 남은 결정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 한때는 최첨단 연구소였다는 소문만 무성한 지하 폐허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축축한 바닥을 밟을 때마다 끈적한 물웅덩이가 튀었다. 천장에서는 알 수 없는 점액질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이따금 들리는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카엘은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벼렸다. 이런 곳에서 방심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한참을 더 헤매던 그의 시야에 낡은 문이 들어왔다. 두꺼운 강철 문은 한쪽 경첩이 떨어져 나간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이건…?”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이곳이 그들이 찾던 곳일지도 몰랐다. 정수 결정은 자연 상태에서 미약한 발광을 하는 특성이 있었다.
카엘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굉음이 정적을 갈랐고, 부서진 문은 이내 바닥에 뒹굴었다. 안쪽은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에서 쏟아지는 먼지 사이로, 공간의 중앙에 놓인 거대한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장치 주변에, 푸른빛을 발하는 작은 결정들이 흩어져 있었다.
“찾았다…!”
피로와 긴장으로 굳어있던 카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변이 생명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폐허가 된 연구실은 흡사 누군가 급히 떠난 듯한 모습이었다. 깨진 유리병, 뒤집힌 의자, 바닥에 뒹구는 낡은 서류들. 그 모든 것이 수백 년 전의 재앙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카엘은 손전등을 들어올려 구석구석을 비췄다. 결정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대충 둘러봐도 배낭을 가득 채울 만큼은 되어 보였다. 그는 주저 없이 결정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차가운 결정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것들을 가져가면, 적어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삭막한 정적을 깨고,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 삭…*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가 땅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
카엘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의 경험이 경고했다. *위험하다. 그것이 온다.*
그는 재빨리 단검을 뽑아 들었다. 사방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손전등이 비추는 작은 원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순히 한 마리가 아니었다. 여러 마리의 생명체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있나…!”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빛을 싫어하는 변이체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은신하는 녀석들인가?
*팟!*
손전등의 빛이 잠시 흔들렸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벽면과 바닥을 기어가는 검고 길쭉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마치 뼈와 가죽만 남은 뱀장어 같기도, 혹은 육중한 벌레 같기도 한 형체였다. 그것들은 빛을 피해 재빨리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젠장, 그림자 벌레인가?’
그림자 벌레는 폐허 속에서 발견되는 가장 흔하고 위험한 변이체 중 하나였다. 수가 많고 움직임이 민첩하며, 빛에 노출되면 잠시 경직되지만, 순식간에 수많은 개체가 달려들어 먹이를 뜯어먹는 잔인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독은 치명적이었다.
카엘은 등을 벽에 기댔다. 최소한 한쪽 방향은 방어할 수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공포가 목을 조여왔지만, 그는 싸워야만 했다. 이곳에서 죽으면, 공동체 모두가 죽는다.
*스스스…*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손전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들이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었다.
하나가 달려들었다. 카엘은 본능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변이체의 몸통이 잘려나가며 역겨운 녹색 체액을 흩뿌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두 번째, 세 번째가 덤벼들었다. 그림자 벌레들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벽과 바닥을 타고 이동하며 사각지대에서 공격해왔다. 카엘은 몸을 돌리고 피하며 단검을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유려했지만, 점점 더 많은 변이체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찍…!*
왼쪽 팔뚝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작은 그림자 벌레 하나가 그의 옷을 뚫고 피부를 긁고 지나간 것이었다. 독은 아직 침투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는 안 돼…!”
카엘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장치는 아직 미약하게나마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직감했다. 저것을 이용해야 한다.
그는 단검으로 변이체들을 쳐내며 장치 쪽으로 몸을 날렸다. 몇몇 그림자 벌레들이 그의 발목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마침내 장치 옆에 도달한 카엘은, 손전등을 장치의 복잡한 패널에 가져다 댔다. 심연의 강림 이전의 기술은 그에게 생소했지만, 그는 절박했다.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을 거야. 강한 빛을 낼 수 있는, 아니면…!
그의 눈에 패널 중앙에 박혀 있는, 가장 크고 푸른 정수 결정이 들어왔다. 장치의 동력원인 듯했다. 그는 주저 없이 단검 끝으로 결정을 찔러 넣었다.
*지이이잉!!!*
정수 결정이 마치 살아있는 듯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장치 전체가 밝은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단순한 발광이 아니었다. 거대한 플래시처럼, 연구실 전체를 일순간 환하게 밝혔다.
갑작스러운 강렬한 빛에 그림자 벌레들은 비명을 지르며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빛에 취약했다. 몸을 뒤틀고 바닥을 기어가며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 발버둥 쳤다.
카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장치에 박힌 정수 결정을 뽑아내며, 손에 쥐고 있던 손전등을 최대로 밝혀냈다. 그리고 미처 어둠 속으로 숨지 못한 그림자 벌레들을 향해 돌진했다.
*쉬이이익! 팍!*
단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고, 빛에 경직된 변이체들의 몸뚱이가 산산조각 났다. 카엘은 숨통을 끊어놓듯 잔혹하게 그림자 벌레들을 처리했다. 그의 표정은 냉정했다. 살기 위해서, 그는 망설일 수 없었다.
몇 분간의 치열한 사투 끝에, 연구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바닥에는 녹색 체액과 검은 변이체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카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검을 내려놓았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고, 팔뚝의 상처는 쓰라렸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배낭을 다시 메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정수 결정들을 서둘러 주워 담았다. 다행히 이번엔 충분한 양이었다. 돌아가면, 그들은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다. 잠시나마.
마지막 결정을 주머니에 넣으려던 그때,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이 있었다. 종잇조각. 정수 결정 밑에 깔려 있던, 누군가 급하게 흘려놓은 듯한 낡은 메모였다.
카엘은 손전등을 비춰 메모를 읽었다. 희미하게 바랜 글씨는 심연의 강림 이전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공허의 심장’ 계획은 실패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들은 대륙의 균열을 통해 올라왔고, 정수는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 마지막 보고. 놈들은… 심연의 문을 열었다.*
카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공허의 심장’ 계획? ‘심연의 문’? 그가 아는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저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만이 그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 메모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더 거대하고 끔찍한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메모의 마지막 줄은 불에 그슬린 듯 검게 변해 있었고, 그 뒤에는 알 수 없는 그림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카엘은 메모를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그가 아는 세상과 달랐다. 정수 결정은 찾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에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는 조용히 문밖으로 나섰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작은 희망과 함께, 이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질문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그리고 심연의 문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는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은 여전히 황폐했고, 그의 길은 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