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시작해 볼까.
별이 우수수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울창한 대나무 숲을 등진 채 서 있는 거대한 건축물, 바로 무림맹의 본산이었다. 수백 년에 한 번 열린다는 ‘천하제일 무술 대회’의 열기가 그 밤하늘을 뚫을 듯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단순히 무림의 지존 자리에 오르는 것을 넘어, 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천공보물’의 계승권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젠장, 또 그 자식 얼굴을 봐야 한다니.”
매화는 쿵, 하고 주먹으로 단단한 나무 기둥을 내리쳤다. 아무리 봐도 매화의 손목보다 훨씬 굵은 기둥이었건만, 한순간 움찔하고 흔들렸다. 매화의 길고 하얀 손가락은 아픈 기색도 없이 매만져지는 검집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매화검’이라 불리는 그녀는 차갑고 도도한 외모와는 달리 속으로는 온갖 짜증을 삭이고 있었다. 짜증의 원인은 단 하나.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천무신’ 천무 때문이었다.
“매화 낭자, 그리 인상을 구기면 고운 얼굴에 주름이….”
뒤에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화는 이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등에 소름이 돋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검은 비단 무복 차림에 대충 묶어 올린 머리카락, 매사에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그 잘난 얼굴.
“시끄러워, 천무. 네 얼굴이야말로 무림의 평화를 깨는 주범 아니냐?”
매화는 매섭게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천무는 그녀의 공격에도 아랑곳없이 씨익 웃으며 어둠 속에서 성큼 걸어 나왔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그제야 매화는 자신이 매번 이 얼굴에 기함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조각 같은 콧날,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눈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치아까지. 완벽하게 잘생긴 외모였다. 문제는 그 외모에 걸맞게 매번 자신을 놀려대는 짓궂은 성격이었다.
“호오, 매화 낭자는 나를 볼 때마다 평화가 깨지는가? 나는 매화 낭자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꽃이 피는데.”
천무는 능청스럽게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매화는 그가 내뱉는 느끼한 멘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더 으르렁거렸다.
“그 꽃 시들어서 네 얼굴을 덮치게 해줄까? 이번 대회에서는 절대로 널 봐주지 않을 거야. 천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하하, 과연 그럴까. 지난번 대련에서도 나에게 졌으면서 말이지. 천하의 운명이 아니라, 네 낭자로서의 운명이나 걱정하는 게 어떠냐?”
“뭐라고? 너야말로 맨날 나에게 달라붙어서 심기나 건드리는 게 일상이면서! 이번에는 기필코 내가 천공보물을 차지해서, 널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날려 버릴 거야!”
매화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천무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흐음, 나를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날려 보낼 힘이라면… 나를 네 옆구리에 영원히 묶어둘 수도 있겠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매화는 검집으로 천무의 옆구리를 냅다 후려쳤다. 천무는 가볍게 피하며 껄껄 웃었다.
“낭자의 애정 표현은 늘 과격하단 말이지. 어서 들어가 쉬어라. 내일은 진정한 무림의 축제가 시작될 테니.”
천무는 그렇게 말하며 매화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매화는 머리를 부여잡고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음 날, 대회는 시작되었다. 수많은 고수들이 각 문파를 대표하여 출전했고, 연무장은 그들의 기합 소리와 무기 부딪히는 소리로 요란했다. 매화는 1회전부터 압도적인 기세로 상대방을 쓰러뜨렸다. 그녀의 매화검법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며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역시 매화검이다! 저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운 검술을 보라!”
“과연 무림의 보배로다!”
관중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매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음 대전표를 확인했다. 그러다 저 멀리서 다시 한번 들려오는 능글맞은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매화 낭자, 아주 잘하고 있더군. 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더없이 완벽한 움직임이었어.”
천무는 매화가 앉아있는 대기석 앞까지 걸어와 말을 걸었다. 그는 이미 3회전까지 가볍게 승리한 뒤였다.
“네놈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늘 쓸모가 없군. 나는 네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어.”
“정말? 그럼 나를 바라보는 그 아련한 눈빛은 무엇일까. 혹시… 날 애타게 기다렸던 건가?”
천무는 매화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매화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뒤로 뺐다.
“착각하지 마! 네가 너무 잘생겨서 눈에 거슬렸을 뿐이야!”
“오호, 내 잘생긴 얼굴이 낭자의 마음에 평화를 깨고 있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천무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매화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자식을 이 대회에서 반드시 꺾고, 그 잘난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대회는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매화와 천무는 승승장구하며 결승을 향해 나아갔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했다.
어느 날 저녁, 매화는 연무장 뒤편의 작은 연못가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고요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이런 밤에는 술 한잔 기울여야 하는 법인데.”
불쑥 나타난 천무가 매화의 옆에 철퍽 앉았다. 그의 손에는 은은한 향이 나는 술병과 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난 술은 안 마셔.”
“알아. 그래서 매화 낭자를 위한 차를 가져왔지.”
천무는 피식 웃으며 잔 하나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향긋한 국화향이 퍼졌다. 매화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놀리기 바빴지, 이렇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가. 내가 낭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늘 이리 깊다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매화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천무는 어깨를 으쓱하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꿍꿍이라면… 매화 낭자의 경계를 풀고 나에게 조금 더 다가오게 하는 것?”
천무의 말에 매화는 움찔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차를 마시는 척했다. 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국화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넌 맨날 그런 말만 하지.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어.”
“바보가 아니면 어때. 낭자가 날 향해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그걸로 충분해.”
천무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의 옆얼굴은 달빛 아래 더욱 돋보였다. 매화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가 담긴 잔만 꽉 쥐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심장이 너무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드디어 결승전.
무림맹 연무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 찼다. 결승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매화와 천무였다. 두 사람은 연무장 중앙에 마주 보고 섰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매화 낭자.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을 거야. 천하의 운명이 달린 마지막 한 수다.”
천무는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검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천무. 이번만큼은… 봐주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선공은 매화였다. 그녀의 매화검은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며 천무를 향해 쇄도했다. 천무는 여유롭게 검격을 피하며 주먹을 뻗었다. 그의 권풍은 산을 쪼갤 듯 강력했다.
매화의 검은 물처럼 흐르며 천무의 주먹을 감아 돌았다. 천무는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매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맹렬한 검기로 다시 공격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 육안으로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검과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제기랄, 저 녀석은 어쩜 저리 한결같이 강한 거야!’ 매화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와중에 심장이 멋대로 뛰는 건 또 뭐고!’
천무는 매화의 날카로운 검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매화는 당황했지만,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천무의 목에 검을 겨눴다. 천무는 동작을 멈췄다. 그의 목에는 매화검의 차가운 검날이 닿아 있었다.
“항복해, 천무.”
매화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하지만 천무는 피식 웃었다.
“그럼 낭자는 날 벨 수 있겠나?”
그의 말에 매화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벨 수 있을까? 천하의 운명을 위해서라면…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이 강하게 거부했다. 천무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알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때, 천무는 순식간에 매화의 손목을 잡아챘다. 매화는 반사적으로 검을 놓쳤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찰나, 천무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매화의 몸이 그의 품에 완전히 안겼다. 두 사람의 얼굴은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무슨… 짓이야!”
매화는 당황하여 천무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천무는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수다, 매화 낭자.”
천무는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매화의 귓가를 스쳤다. 매화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때, 천무는 매화의 입술에 키스했다.
연무장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관중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서, 무림의 두 지존이 키스라니!
키스는 짧았지만 강렬했다. 천무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매화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매화의 얼굴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크흠… 천무신 천무!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무림맹주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천무는 매화를 품에서 놓아주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무례라뇨? 저는 그저 ‘천공보물’을 얻는 방법이 꼭 무력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천공보물은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자에게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매화 낭자의 마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천무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매화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네, 네놈…!”
매화가 뭐라 더 말을 하려던 순간, 무림맹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둘 다 결승전에서 무례를 범했으니, 우승은 무효다!”
그 말에 천무는 껄껄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천하의 운명은 이미 매화 낭자에게 달려있으니.”
천무는 매화에게 윙크를 했다. 매화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대회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천공보물의 행방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았지만, 무림에는 새로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천무신 천무가 매화검 매화를 얻기 위해 무림대회 결승에서 키스를 감행했다는, 전무후무한 스캔들이었다.
“야, 천무! 너 오늘 나랑 한 판 더 붙어야 할 것 같아!”
대회가 끝난 다음 날, 매화는 천무를 찾아와 검을 빼 들었다. 천무는 피식 웃으며 매화의 검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또 나에게 지면, 내 옆구리에 평생 묶여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나, 매화 낭자?”
매화는 대답 대신 천무를 향해 맹렬한 검기를 날렸다. 천무는 즐거운 듯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천하의 운명은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매화와 천무의 운명은 이제 막 시작된 로맨틱 코미디처럼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대결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터였다. 그리고 그 대결 속에서, 천하의 운명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사랑 이야기가 피어날 것임을 두 사람만이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천무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매화의 검을 받아치는 그의 눈빛 속에는, 이미 승리한 자의 여유로움이 가득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