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화: 망각의 심연
차디찬 바람이 살갗을 베었다. 거대한 암벽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른 거친 산맥의 한가운데, 카인은 낡은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미며 발아래 펼쳐진 심연을 응시했다. 바람은 바위틈을 훑고 지나며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소리를 토해냈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은 영혼들이 산맥을 헤매는 듯 음산하게 들렸다.
“젠장, 바람이 더 거칠어졌군.”
카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지난 수십 년간 숱한 지하 유적과 폐허를 누비며 다져진 그의 육체는 여전히 강인했으나, 세월의 흔적은 목소리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데 탁월한 젊은 학자, 엘리가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품에 안은 두꺼운 양피지 뭉치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곳이 맞나요, 카인님? 전승에 따르면 ‘영원의 침묵’이라 불리는 곳은 잊힌 신들의 숨결마저 얼어붙는 차가운 곳이라고….”
엘리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그녀에게 이런 극한의 환경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탐구심과 함께 깊은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승이 틀린 적이 있었나? 자, 봐라. 저 아래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침묵’의 입구다.”
카인은 턱짓으로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구덩이를 가리켰다. 인공적으로 파인 듯한 완벽한 원형의 구덩이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린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간간이 섬뜩한 형상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문자는 마치 경고처럼 보였다.
엘리는 조심스럽게 구덩이 가장자리로 다가섰다.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내며, 그녀는 양피지 뭉치 중 하나를 펼쳤다. 낡은 양피지 위에는 흐릿한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했다.
“이건… ‘심연으로 가는 문’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리고 그 아래에는… ‘산 자는 들어설 수 없으며, 들어선 자는 산 자로 돌아올 수 없다’… 경고 문구로군요.”
엘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카인은 피식 비웃었다.
“언제는 경고 문구가 없었나? 경고 없는 유적이 더 수상한 법이지. 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최대한 깊이 내려가야 해.”
그는 허리춤에 찬 밧줄과 갈고리를 능숙하게 꺼내 들었다. 밧줄의 한쪽 끝을 튼튼한 바위 기둥에 묶고는 다른 쪽 끝을 구덩이 아래로 던졌다. 밧줄은 한참을 내려가고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준비됐나, 학자 양반? 발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저승행이다.”
“네, 네… 카인님. 하지만… 이 전설은 다른 유적들과는 다릅니다. 이 밑에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대의 공포가 잠들어 있다고 해요.”
엘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양피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공포? 내가 상대해 본 공포 중에 가장 끔찍한 건 빈 지갑과 썩어빠진 권력을 쥔 인간들이었지. 자, 이제 잔말 말고 내려가자. 시간이 없으니.”
카인은 먼저 밧줄을 잡고 망설임 없이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움직임은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유려하고 단호했다. 엘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따랐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찢어발기는 듯했다. 밧줄에 의지한 채 내려가는 동안, 구덩이 안쪽 벽면에 새겨진 거대한 문양들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섬뜩하리만큼 정교한, 그러나 알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기하학적인 도형들이었다. 때때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한 문양들도 눈에 띄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의 심장이 아주 약하게 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그들은 드디어 단단한 땅에 발을 디뎠다. 이곳은 더 이상 바깥의 거친 산맥이 아니었다. 거대한 암반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듯한 인공적인 통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통로의 폭은 어른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였고, 천장은 아득히 높았다. 횃불도 없는 이곳은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카인은 망토 안에서 작은 마법석 램프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램프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터져 나오자, 그 빛은 통로의 벽면을 비췄다. 흙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지만, 벽면의 돌들은 놀랍도록 매끄러웠다. 마치 수백 년 전의 장인이 방금 갈고닦은 것처럼.
“이런 건축 양식은 처음 보는군요… 어느 문명권의 것도 아니에요.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엘리는 황홀경에 빠진 듯 벽면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녀의 학자로서의 열정이 두려움을 잠시 잊게 한 듯했다.
“기록에 없다는 건, 기록에 남길 가치조차 없었거나… 아니면 기록할 수 없었을 만큼 철저히 잊혔다는 뜻이지.”
카인은 주위를 경계하며 램프를 앞쪽으로 비췄다. 통로는 곧게 뻗어 있었고, 그 끝에는 어렴풋이 거대한 문이 서 있는 듯했다. 오래된 비석처럼 육중하고 웅장한 문.
그들이 문으로 다가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차가워졌다. 램프의 푸른빛조차 흡수하는 듯한 짙은 어둠이 그들을 에워쌌다. 문 앞에는 닳아빠진 돌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말라붙은 흔적이 역력했다. 핏자국처럼 보였다.
“피… 피의 흔적이에요. 그리고… 이 문양은…! 제가 본 어떤 고대 언어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경고하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요.”
엘리는 제단의 흔적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카인은 말없이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문은 놀랍도록 견고했으며, 어떤 마법적인 힘으로 봉인된 듯했다. 그는 손에 든 램프를 들어 올려 문의 상단을 비췄다.
거기에는 거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방금 엘리가 불길하다고 했던 바로 그 기호였다. 그것은 어떤 짐승의 눈 같기도 하고, 어떤 존재의 흉측한 심장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호의 정중앙에, 작은 균열이 나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어놓은 듯한 균열이었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문 안쪽에서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익… 쉬이이익….
마치 거대한 짐승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듯한 소리였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괴하고 불길한 소리에 엘리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카인의 얼굴에도 미세한 긴장감이 스쳤다. 그는 램프를 든 손을 살짝 떨었지만, 이내 단호하게 소리쳤다.
“이런… 벌써 깨어난 건가?”
그의 말과 함께, 문에 새겨진 짐승의 눈 같은 문양에서 붉은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가운 공기가 기이한 진동을 시작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웅장하고 불길한 진동이었다.
잊힌 심연의 문이, 마침내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