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팔각정의 검은 그림자, 매화의 투정
“아, 망할. 진짜 망했네!”
매화는 육포를 오물거리다 말고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기암절벽, 그 끝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소나무 가지 위, 세상 편한 자세로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던 그녀였다. 쨍한 햇살이 눈을 찔렀지만, 더 눈을 찌르는 것은 머리 위로 솟아오른 태양의 위치였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누가 봐도 ‘오후’였다.
“아악! 오늘이 예선 등록 마감일이잖아!”
어제 밤새 술잔치를 벌이며 제자들이랍시고 데려온 덩치 큰 사내들 셋과 함께 허풍을 떨다가 그만 과음한 탓이었다. 매화문은 작고 볼품없는 문파였지만, 기개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는 그녀였다. 문제는, 그 기개가 종종 망각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무릎 꿇는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발밑으로는 아찔한 절벽 아래로 운해가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며칠 전부터 사부님이 귓등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했던 ‘천하제일 무림대회’ 예선 등록. 우승자에게는 무림맹주의 지위와 함께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절대무공 비급의 열람 권한이 주어지는, 그야말로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행사였다. 비록 매화문 같은 듣보잡 문파에는 그림의 떡이라 여겨졌지만, 사부님은 “이번 기회에 우리 매화문의 이름을 천하에 떨쳐야 한다!”며 비장하게 소리치셨다.
물론, 비장의 각오를 한 매화는 지금 이 순간, 지각으로 대회장 문턱도 못 밟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부님, 제발 저를 용서하세요…!”
급하게 몸을 던져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공중에 몸을 던지는 아찔한 광경이었지만, 매화의 얼굴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었다. 아니, 불안할 틈도 없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등에 짊어진 보따리 속에서 간밤에 남은 육포 조각을 찾아 입에 밀어 넣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녀의 몸은 절벽을 따라 솟아난 삐죽한 돌출부와 나무줄기를 딛고 번개처럼 내려갔다. 마치 발이 땅에 닿은 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매화문의 경공술 ‘낙매비천’ (落梅飛天)은 그 어떤 문파의 경공술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의 기술이었다. 비록 매화문이 소규모 문파라 알려지지 않았을 뿐.
수백 미터 아래, 숲이 우거진 평지에 도착한 매화는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대회장은 삼백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지금부터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도 마감 시간인 해시(亥時) 직전이나 겨우 도착할까 말까 한 거리였다.
“젠장, 젠장, 젠장!”
육포 조각이 어느새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매화는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보따리를 뒤졌다. 어제 남겨놓은 주먹밥이 있었던가. 주먹밥… 주먹밥! 없다!
“세상에, 내 주먹밥 어디 갔어?! 흑룡방 놈들이 다 처먹었나!”
지각보다 더 심각한 사태에 매화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에게 있어서 끼니를 거르는 것은 무림의 존폐 문제보다 더 중대한 사안이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그녀는 다시 경공술을 전개했다. 이번엔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그야말로 발에 불이 붙은 듯 달렸다. 스쳐 지나가는 숲과 들판이 한 폭의 그림처럼 번개같이 사라졌다.
* * *
천하제일 무림대회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용성각(龍星閣)’에서 개최되었다. 용성각은 무림맹의 본거지이기도 했으며, 평소에는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성지였다. 하지만 대회 기간 동안에는 예외였다. 오늘따라 용성각 앞마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 문파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문파원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모인 강호의 방랑객들까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번화한 길거리에는 온갖 주전부리 장수들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끌고 있었다. “따끈따끈한 호빵이오! 무림 고수도 반한 그 맛!” “시원한 식혜 한 사발! 갈증 해소에 최고!”
하지만 이 모든 활기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용성각 입구에 길게 늘어선 줄은 사뭇 진지한 기운을 풍겼다. 대회 예선 등록을 위한 줄이었다. 각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그들의 위용을 과시했다. 소림, 무당, 화산, 개방… 이름만 들어도 무릎이 절로 꿇리는 정파의 거두들부터, 강호의 뒷골목을 주름잡는 사파의 맹주들까지. 수많은 고수들이 저마다의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천검문(天劍門)’의 줄이었다. 그들은 모두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등에 짊어진 검집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감히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줄의 맨 앞에는, 마치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천검무제(天劍武帝)’라 불리는 천무(天武)였다.
수려한 용모는 차가운 칼날 같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은 마치 검은 심연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의 온몸에서는 절제된 강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잡음이 사라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했다. 이번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지는 인물이었다.
“천무님께서 드디어 등록하시는군!”
“역시 천검문의 후계자다운 위용이십니다.”
“저 강기!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천무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용성각의 문을 향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비켜! 비키라고! 살려줘요,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어! 아니, 등록 못 해 죽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요란한 비명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한 작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고, 옷차림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등에 짊어진 보따리는 이리저리 덜렁거렸고,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매화였다.
그녀는 마치 쏜살같이 날아든 화살처럼 등록 줄을 뚫고 쇄도했다. 앞서가던 문파원들은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질렀다. “저건 또 뭐야!” “미친 여자 아니야?!”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해서요!” 매화는 외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등록대만을 향해 있었다. “이대로 가면 우리 매화문의 명예가… 아니, 내 목숨이 위태로워!”
결국, 그녀는 가장 먼저 등록대 앞에 서 있던 천무의 등 뒤에 ‘쿵’ 하고 부딪혔다.
“으악!”
매화는 그대로 나뒹굴 뻔했지만, 천무의 등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그 충격에도 불구하고 천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매화를 응시했다.
차가운 시선, 무표정한 얼굴. 거기에는 불쾌함도, 놀라움도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음 같은 시선만이 매화를 꿰뚫었다.
매화는 그제야 자신이 거대한 사고를 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도포 위에 선명하게 찍힌 자신의 흙먼지 묻은 손자국이었다. 그리고 그 손자국 바로 아래에는 천검문의 문양, 즉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수놓아져 있었다.
“어… 저기… 죄송합니다…”
매화는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너무 급해서 그만… 손이… 발이… 아니, 정신이 없어서…”
천무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묵은 주변의 소음마저 삼켜버릴 듯한 압도적인 침묵이었다. 마치 시퍼런 검날이 목에 닿은 듯한 위압감에 매화는 침만 꿀꺽 삼켰다.
그때, 천검문의 제자로 보이는 한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 천한 것! 감히 천검무제께 무례를 범하다니!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지 못할까!”
천검문의 제자는 손을 들어 매화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이 매화에게 닿기도 전, 천무가 손짓으로 제자를 제지했다.
“그만.”
짧고 단호한 한마디였다. 제자는 놀란 듯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천무는 다시 매화를 돌아보았다.
“급한가 보군.”
무표정한 얼굴에서 툭 던져진 말이었다. 매화는 고개를 더 숙였다.
“네… 네! 예선 등록이 마감 시간 직전이라… 제가 정말, 정말 급해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천무는 매화의 산발이 된 머리와 흙먼지투성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짧은 순간이어서, 매화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어가라.”
그는 등록대 쪽으로 턱짓을 했다. 뜻밖의 반응에 매화는 얼떨떨했다.
“네? 저… 저보고 먼저 들어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천무는 아무 말 없이 매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내가 농담하는 것 같으냐?’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매화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번개처럼 등록대로 달려갔다. “저… 저 매화문(梅花門) 매화(梅花)입니다! 등록해 주세요!”
등록을 담당하던 무림맹원은 매화의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천무가 자신보다 먼저 양보했다는 사실에 놀라 얼른 등록 서류를 내밀었다. 매화는 손이 떨리는 와중에도 서둘러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해시까지는 아직 한 시진(兩時間) 정도 남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마감 시간이 임박한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휴우… 살았다!”
가까스로 등록을 마친 매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늦지 않았군.”
천무였다. 그가 매화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매화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천무는 이미 자신의 등록을 마치고 돌아보는 길이었다.
“네? 아, 아닙니다! 제가 폐를 끼쳤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첫 번째 경기에서 만나면 봐주지 않겠다.”
천무의 차가운 눈빛이 매화를 향했다.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매화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에는 ‘절대 지존’의 자리를 향한 강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하하… 당연하죠! 저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매화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젠장, 저런 괴물과 붙으면 뼈도 못 추릴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천무는 여전히 매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매화의 보따리로 향했다.
“무엇이 들었기에 그리 급했나.”
매화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의 보따리에는 주먹밥도, 육포도 없었다. 아까 육포는 이미 다 먹어버렸고, 주먹밥은 흑룡방 놈들이 훔쳐 먹은 게 분명했다. 대신 그녀의 보따리 속에는…
“아, 이건… 제 비장의 무기입니다!”
매화는 얼른 보따리를 등 뒤로 감췄다. 사실 비장의 무기랍시고 들고 다닌 것은, 사부님이 직접 담그신 ‘매화주’였다. 매화주만 있다면 어떤 고수든 이길 수 있다고 사부님은 늘 말씀하셨지만, 그 ‘이긴다’는 의미가 물리적인 승리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취해서 정신을 잃는다는 것인지 매화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비장의 무기라.”
천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재미있다는 듯한 미묘한 변화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매화는 자신도 모르게 허세를 부렸다. 천무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입가에 다시 한번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듯했다.
“기대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유유히 사라졌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의 걸음걸이는 군더더기 없이 우아했다.
매화는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긴장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망했어! 첫 경기에서 저런 괴물을 만나면 어떡하지?!”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오늘 하루가 험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게다가 너무 배고파… 어제 그놈들 육포를 왜 다 뺏어 먹었지?”
배고픔과 함께 천무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 대회, 매화문의 명예는 고사하고, 자기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지루한 무림 생활에 드디어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1장 끝)
